뉴스종합 > 특집기사 >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 #10.생명의 보고에서 걸어나와 도심을 가로질러 무왕로를 만나는 선화로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 #10.생명의 보고에서 걸어나와 도심을 가로질러 무왕로를 만나는 선화로

▲ 공단 길에서 숨은 공원과 휴식처를 만나고 옛 시대를 상상해보다

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

<편집자주>

발밑 내려다보기

산업단지의 공장들을 경계선처럼 나누고 있는 길의 이미지는 당연히 딱딱하고 삭막하기 마련일 것이다. 탱크로리나 컨테이너를 실은 트레일러 같은 화물트럭들이 도로를 장악하고 있으며 길 가에 접해 있는 공장 울타리는 철조망이나 멋없는 벽으로 이뤄져 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파이프관이나 전선들이 길을 건너다니고 군데군데 위험물이라고 쓰인 표지판도 눈에 띈다. 그러니 산업단지의 길은 당연히 사람들이 즐겨야 될 이유가 없는 그저 ‘통로’의 기능에 충실한 길이 된다.

그래서 딱딱한 산업단지의 길에는 당연히 이야깃거리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공기도 나빠서 차를 타고 지나치는 것도 꺼려지는 형편이다. 더구나 익산시의 악취를 생각하면 산업단지를 통과하는 것은 고역이라고 할 수도 있다.

허나 고개를 돌려 나아가야 할 방향의 길이 아니라 바로 발밑을 내려다보기만 하면 삭막한 것 같은 길에서도 보석 같은 이야기들을 마주할 수 있다.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길에서 잠시 이탈한 것 같은 기분으로 산업단지를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갖기 바란다. 이번 선화로를 따라 걷는 여정 가운데 만난 익산시 제1국가산업단지에는 과연 어떤 풍경과 이야기가 있을지 따라와 봐도 좋을 터이다.

공업단지의 흔적

'한국외환은행'이라는 글씨를 지웠지만 흔적은 남았다.

1공단사거리에서 약촌로를 바라보면 오거리가 훤히 보인다.

선화로는 1공단 사거리에서 약촌로와 교차한다. 사거리에서 약촌5거리 방향을 바라보면 내리막길 밑으로 오거리가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로 시야가 트여 있다. 교차로에서 보면 일단 KEB하나은행이 눈에 들어온다. 오래도록 한국외환은행으로 자리했던 만큼 글씨를 지운 표지석엔 아직 과거의 이름이 선연히 드러나 보인다. 사람도 이름을 바꾸면 일단 불편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던데, 표지석의 이름을 바꾸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닌가보다. 지저분해 보이는 간판을 달고 있는 게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은행의 길 건너에는 꽤 큰 규모의 게시판이 자리해 있다. 과거 포스터 등 각종 안내문들이 붙어 지나는 공단 근로자들에게 정보가 제공됐던 게시판은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모습이다. 시대가 바뀌며 정보를 접하는 길이 바뀐 것이리라. 지저분한 유리창의 스티커 자국들이 쓸쓸하게 보였다.

사거리에서 약촌오거리 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다 보면 버스정류장이 나타난다. 정류장 이름은 ‘1공단사거리’. 정류소 주변에는 돌로 제작된 노란색 벤치가 있고 정류소 안에는 목재로 된 기다란 의자가 버스이용자를 기다리고 있다. 벗겨진 페인트와 닳은 나무 벤치가 이곳이 삶의 현장임을 나타내며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이 정류소에 접근하면 가장 먼저 시원함을 느끼게 되는데 그 원인은 바로 나무 그늘이다. 울타리 안쪽의 나무들이 인도를 그늘로 뒤덮을 정도로 자라 천연 에어컨이 돼주고 있는 것. 산업단지를 조성할 당시 심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나무들이 수령이 제법 됐다는 얘기다.

공장 속의 오아시스

공짜로 얻은 시원함을 고맙게 여기며 지나가려는 찰나 버스정류소 뒤편으로 자그마한 쪽길이 나있음을 발견했다. 아마도 정문으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바로 울타리를 지나 버스정류장으로 나오기 위한 길인 것으로 보인다. 반들반들하게 닦인 길로 보아 사람들의 통행이 제법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익산세관 정원의 시원한 오솔길

그 안으로 들어서니 산업단지에서 만나기 힘들 것 같은 공간이 펼쳐졌다. 깊은 숲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큰 나무들이 즐비하고 꽃과 열매들을 비롯해 새들의 지저귐마저 싱그러움을 전해주고 있었다. 그야말로 산업단지 가운데 오아시스의 느낌이다.

이 지역을 수차례 지나치면서도 울타리 너머에 이런 공간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저기 수십 미터 앞 울타리 밖 큰 길에서 지나가는 차량 안의 사람들도 모두 그러할 가능성이 크다. 산업단지라는 이미지가 그러한 생각조차 품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익산세관 건물에 감시탑이 보인다

창고를 감시하던 감시탑 내부의 모습

주위를 둘러보니 세관과 관련한 업체들이 입주한 건물들이다. 익산세관을 중심으로 관세사 사무실들이 눈에 띄었다. 관련 업무 종사자들이 아니라면 이러한 산단 속의 오아시스를 지나치며 살아가는 것이리라.

나무들을 따라 산책하듯 걷다보니 세관 뒤편 건물에 다다랐다. 오래된 것 같은 건물에서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식당 주변으로 텃밭이 잘 가꿔져 있어 마치 시골집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선화로를 따라 걷기 시작할 즈음에 심었던 고추 묘목이 그세 자라서 주렁주렁 빛깔 좋은 고추를 매달고 있었다.

약촌식당 텃밭에 고추가 주렁주렁 열렸다

약촌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최영대 사장

텃밭을 가꾸며 약촌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최영대(62)씨는 “직접 가꾼 채소를 이용해 싱싱한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며 “잘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공단 지역에선 꽤 알려져 있고 특히 라면이 맛있는 집으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최 씨에 따르면 약촌식당 건물은 예전에 보건소로 사용되던 관공서였다고 한다. 그리고 봄이 되면 우거진 벚꽃나무들 덕분에 환상적인 공간으로 바뀐다고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무성하게 푸른 잎을 달고 있는 나무들만 봐도 저절로 ‘힐링’이 될 정도다. 아니나 다를까 무더운 더위 속의 방문에도 시원한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다.

밤새 창고를 지키던 시절

산단 거리의 가로수 길이 근사하게 보인다

볕이 들어올 새가 없을 정도로 그늘이 많은 통로를 따라 다시 선화로로 나와 보니 신흥치안센터와 119공단안전센터가 나타났다. 노란 빛깔의 소방차가 신기해 소방관에게 물어보니 화학 방재용 소방차란다. 공단지역답게 각종 화학물질 유출사고에 대비한 소방차가 배치돼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길 건너편에는 각종 독성 화학물질이 들어있을 것만 같은 탱크들이 숱하게 보였다. 소방차를 쓸 일이 없는 것이 백번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흥치안센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인력부족으로 부송지구대에서 순찰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중이었다. 센터 외벽에서 여러 자물쇠가 달린 철문을 발견하고 용도가 궁금해 수소문해보니 과거 이 건물에 예비군 중대가 입주해 있었으며 당시 사용했던 무기를 보관하기 위한 무기고였다고 한다.

선화로에서 익산 세관비지니스센터를 보면 용도를 짐작하기 힘든 옥상 구조물이 바라다 보인다. 2층 건물 중앙에 꼭 공항 관제탑을 닮은 구조물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궁금해서 직접 올라가보니 텅 비어 있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공간으로 보였다. 사방이 유리창으로 둘러져 있어 과거에 무언가 관측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 노끈을 걸어놓고 시래기를 널어 말렸던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세관 직원들을 수소문해 구조물의 용도를 물어봤다. 다들 직접 보지는 못하고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들이었지만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세관에서 보세창고를 감시하기 위한 감시탑이었던 것으로 모아진다.

그러니까 과거 세관 주위로 보세창고가 자리해 있었는데 그 주위로 많은 수·출입 물건들이 보관돼있었고 이 창고를 지키기 위해 밤새 근무를 서던 공간이었다는 얘기다. 수출자유지역으로 익산의 경기가 활황세를 보일 당시 그만큼 이 곳을 지나가는 물건들이 숱했다는 얘기다. 또한 도둑들도 많았기 때문에 그만큼 보안이 중요하기도 했을 법하다.

산단 길에 핀 들꽃무리가 거리를 화사하게 만들고 있다

산업단지가 오랜 시간을 영위해 왔다는 것은 꼭 단지 내 공장에서가 아니라 길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인도를 다 차지할 정도로 굻게 자란 가로수들은 이제 산업단지의 명물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이런 모습은 시간이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그림일 것이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가니, 언젠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있을 것이다.

익산 제1국가산단의 모습

정완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