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

<편집자주>

이쯤에서 쉬었다 갈까

장맛비가 시원하게 내린 뒤의 길이다. 가뭄 걱정이야 덜었건만 이전보다 배로 무더워졌다는 건 예상치 못한 복병이나 다름없어 한껏 긴장된 상태다. 아직 한참 동안이나 남은 여름이 맹렬한 폭염 공격을 더욱 거세게 몰아치리라는 건 지금의 더위를 말리는 데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러다 아스팔트 위에서 계란프라이를 하는 장면이 또다시 TV전파를 타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다. 피난이라도 가듯 바닷가나 계곡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맘때쯤엔 더워지는 만큼 분노지수도 높아지며 각종 사건 발생의 원인이 더위 때문이었더라는 허탈한 뉴스도 나돌기 시작할 터이다.

그래서 더운 날일수록 적절한 휴식이 중요하다. 마침 비 개인 뒤라 극성을 부리던 미세먼지도 가라앉아 숨쉬기만큼은 쾌적한 수준이어서 내리쬐는 햇빛과 지글거리는 아스팔트만 피하면 간신히 버틸 정도다. 나무 그늘이 필요한 순간이랄까.

마침 선화로를 따라 걷는 여정 가운데 익산 제1국가산업단지를 빠져나오니 쉴만한 공간이 나타났다. 단순히 쉬어갈 정도가 아니라 휴식을 만끽하기 충분한 곳, 바로 중앙체육공원이다. 푸르른 나무들이 잔뜩 그늘을 만들고 있는 공원이 길 건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는 느낌이었다. 발걸음이 저절로 공원으로 향했다. 더위도 더위지만 삭막한 분위기의 산업단지를 통과한 나그네에게는 적절한 휴식이 필요했다.

모두를 기다리는 조각 공원

서둘러 중앙체육공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우거진 나무들이 뙤약볕을 막아줌으로써 생긴 그늘은 이런 날 특히 고맙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나무들은 아낌없이 그늘을 내어준다는 말이 있는데 최근에는 나무들이 가뭄으로 허덕일 때 물주머니를 달아주는 것으로 보아 상부상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중앙체육공원의 명물 음악분수

중앙체육공원은 2002년 개장한 다목적 공원으로 테니스장과 축구장 등 체육시설과 음악분수대를 비롯한 다양한 휴식시설로 익산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공원이다. 국화축제와 같은 익산시의 크고 작은 행사를 소화하고 있기에 지역 공원이라기보다 익산시민 모두의 공원이라는 느낌이다.

한 낮의 더위가 사람들의 외출도 가로막았는지 공원은 무척 한산했다. 테니스코트도 인기척이 없는 듯 조용했고 간혹 걷기 운동을 하거나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지나쳐갔다.

파랑색 산책로를 따라 걷는 길

공원 내부에서 그늘을 찾아 걷다보니 땀이 저절로 식혀지며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 공원에는 꽤 많은 조각상들이 군데군데 설치돼 있어 조각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그러니 돌조각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안내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돌아보는 것도 좋은 데이트 코스나 산책 코스가 되기에 충분하다.

맨발지압로가 조성돼 있다

이번 방문에서 만난 작품들도 인상적이었다. 한 작품 앞에서는 대체 무얼 조각해 놓은 작품인지 몰라 한참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는데 내용을 알고 보니 휴대폰이었다. 영국 작가 조엘 그레이의 ‘서 있는 휴대폰’이라는 작품인데, 그 모양이 철지난 휴대폰이었던 탓에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작가는 돌기둥에 조각한 휴대전화 작품을 ‘모든 문화와 기술이 샤머니즘적 양상으로 휴대폰에 투영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과연 작가는 휴대폰의 디자인이 달라진 탓에 이제 작품을 보고 휴대폰이라는 인식마저 할 수 없게 된 상황을 알고 있었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다.

휴대폰 모양의 조각작품

또 하나 축구장 근처에서 만난 조각도 인상 깊었다. 길에서 바라본 조각은 뒤돌아서 있는 사람의 모습인데 제목은 ‘시선 마주보기(그림자)’였다. 뒷모습을 표현한 조각의 반대편은 어떤지 궁금해 돌아보니 반대편 역시 앞모습과 같은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앞뒤가 모두 뒷모습인 사람을 형상화해 시선이 마주보고 있음을 나타낸 작품이었다.

앞뒤 모두 뒷모습인 조각작품

걷기에 좋은 공원길

조각들이 주는 즐거움 이외에도 공원 속의 숨은 보물들은 무궁무진하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단연 산책로로 아마도 익산시내 권에서 가장 걷기 즐거운 길이 아닐까 싶다. 한 바퀴가 약 3.2Km로 평지뿐만 아니라 적당한 언덕으로 이뤄져 있어 지루함을 덜어 줄뿐만 아니라 숲과 음악분수 및 체육시설을 두루 지나치도록 돼있어 저절로 걷게 되는 마술 같은 길로 정평이 나있다. 이에 일부러 이 공원을 찾아 걷기 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람도 꽤 된다고 한다.

전화부스를 이용한 작은도서관

아름답게 조성된 인공폭포는 가동되는 일이 드물다

이 밖에도 공원에는 맨발지압로, 음악분수대, 공중전화부스를 이용한 작은도서관 등 많은 보물들이 공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도심 속 계곡을 연출하는 인공폭포의 경우는 가동되는 경우가 드물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행사가 있을 때만 제한적으로 가동된다고 한다. 음악분수는 매일 가동되며 공원의 명물로 자리 잡고 있다.

귀신같이 장마를 부르는 꽃

자귀나무가 꽃을 활짝 피워냈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자귀나무가 꽃을 활짝 틔운 것을 발견했다. 공원 내에 몇 그루의 자귀나무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마치 폭죽이 터진 것과 같이 불꽃 모양으로 꽃이 활짝 핀 모습이 반가웠다.

자귀나무는 ‘자는 귀신’이라는 뜻으로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고 나무를 깍는 도구인 ‘자귀’를 만드는 나무였다고 해서 자귀나무라 불렀다는 설도 있는데, 특히 자귀나무의 꽃은 장마를 알려주는 꽃으로 유명하다. 해마다 가뭄이 지속되다 장마를 앞둔 시점에 꽃을 틔워내기 때문에 장마를 불러온다거나 장마를 알려주는 꽃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또 자귀나무 꽃은 밤이면 활짝 폈던 꽃이 오므려지면서 서로 엉켜있게 되는데 이를 보고 옛 사람들은 야합수(夜合樹)라 부르며 신혼부부 창가에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익산문화원 뒤편에는

익산문화원 전경

공원 축구장에서 서쪽으로 무지개 계단을 오르면 공원 경계 너머에 익산문화원이 있고 그 뒤로는 조그만 숲이다. 숲 속이 어떨까 궁금해 문화원 옆길로 난 오솔길로 들어서니 곧바로 산길이 나타나고 전혀 정비돼있지 않은 공간이 나타났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지 풀로 무성히 덮여 있을 뿐이었다. 그 길에서 도심 방향을 바라보니 마치 딴 세상으로 보일 정도로 단절된 느낌이다.

길을 따라 더 들어가노라니 소나무가 우거지면서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고 있었다. 허나 산책로가 정비돼있지 않아 더 이상 들어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숲길을 따라가면 최근에 건축된 익산예술의전당까지 닿을 수 있을 것 같아 제대로 된 산책로 정비가 아쉬웠다. 잘 만들어진 공원 산책로도 좋지만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숲길도 조성해준다면 훨씬 더 좋을 것 같다. 때 아닌 이방인의 방문을 받은 듯 숲속의 이름 모를 새가 계속 시끄럽게 울어댔지만 숲길을 걸으며 듣기에 그리 나쁘지 않은 음악이었다. “그래, 나도 반가워”라고 한마디 해주고 돌아왔다.

익산문화원을 지나 다시 선화로에 돌아왔다. 먼 길을 걷고 많은 것을 보고 지나친 것 같았지만 이제 겨우 중앙체육공원을 빠져나온 길이다. 제대로 휴식을 가졌다고나 할까.

제주도의 전북도민들이 세운 돌하르방

익산문화원이 있는 선화로 변에는 제주도에서나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돌하르방이 있다. 사연이 무엇일까 하여 들여다보니 제주도에 사는 전북도민들이 세운 것이다. 고향을 떠나 살면서도 잊지 않고 고향을 생각하는 이들의 마음이 돌하르방에 담긴 것이리라.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만 또 사람은 다 같은 이심전심이어서 익산의 돌하르방을 보고도 먼 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번에 알아차리기 마련이었다.

정완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