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

<편집자주>

옥수수 익어가는 한 여름

한가로운 마을길을 걷노라면 느긋한 기분에 자꾸 주변을 살피게 된다. 특히나 처음 가보는 길이라면 주택의 형태에서부터 텃밭엔 어떤 작물이 자라고 있는지 유심히 관찰하기 마련이다. 시골길은 너무나 당연하게 구불구불하다. 그 이유는 땅의 높고 낮은 모양에 맞춰 다니기 편하게 길을 냈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길을 걸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방향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길을 걷는 것만으로 마을 구석구석을 관찰하기 좋은 이유다. 그렇게 길은 굽었지만 길을 따라가면 결국 마을 중앙으로 이어지기 십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시 길은 어디론가 흩어진다.

길가에 종종 심어 놓은 옥수수는 한여름 날씨에 알차게 익어가는 듯 붉은 수염을 내놓고 있다. “저놈을 따다가 푹 삶아 먹으면 참으로 맛나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난다.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던 식욕이다. 길에서 탐스럽게 익어가는 작물들을 바라보면 없던 식욕이 절로 생겨나는 것을 느낀다. 입으로는 침을 삼키고 손으로는 땀을 훔치며 마을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이제(梨堤)’마을까지 왔다. 과거 지명으로는 ‘배못’이라고 하는데 이를 한자 지명으로 바꾸면서 이제마을 됐다고 하다. 헌데 ‘배’가 과연 과일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또한 이 마을에 연못이 있었던 것일까 궁금해져 발걸음이 빨라졌다.

배못마을의 연못을 찾아서

마을 안으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가노라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마을 중앙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 가운데에는 나무가 심어져 있어 그늘을 드리우고 있고 그 아래에 긴 벤치에는 마을 아낙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마을 모습이지만 바로 15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커다란 화학공장이 가동 중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놀랄만한 일이다.

산업단지와 가까이 붙어 있으면서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마을의 비결이 뭘까. 그것은 마을의 방향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마을은 지대가 높은 쪽인 산업단지를 배후로 놓고 반대방향인 남향을 향해 마을이 열려 있다. 이에 집들도 대부분 남서쪽이나 남쪽을 하고 있다. 이에 지대가 높은 쪽인 산업단지 방향으로는 바라볼 일도 없을뿐더러 숲이 가로막고 있어서 공장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마을 주민 소선영 씨

그런데 배못마을 안에서 아무리 둘러봐도 연못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사라졌을 수도 있고 원래부터 연못이 없었을 수 있다. 지명은 세월이 지나면서 본래 뜻을 잃어버리거나 아예 다른 뜻으로 변하기도 하기 마련이니까. 사람이 사람에게 입으로 전해주는 정보의 약점인 셈이다. 과실수와 꽃들이 잘 어우러진 이제마을을 더운 줄도 모르고 감상하며 다니다 자전거를 타고 나타난 마을 주민 소선영(78) 씨를 만났다.

소선영 씨는 “전에도 우리 배못마을에 연못이 어딨냐고 찾아와 묻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연못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실은 배가 들어오는 물길이 있었던 것으로 들었다”며 “여기 마을 앞까지 배가 다녔고 배를 묶어두는 곳이 있어서 배못이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소선영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보니 달리보이는 것이 있었다. 마을 앞까지 깊은 곳을 따라 들어오는 논이 과거에는 물길이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나가면 익산천에 합류해 만경강으로 통했을 것이다. 그런 물길이 없어진 대신 물결무늬의 논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경계를 지키는 늠름한 파수꾼

이제마을 주민들이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물이 낮은 곳을 찾아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들르게 됐던 이제마을을 떠나 다시 본류인 선화로로 회귀했다. 2공단 사거리, 주거 밀집지역과 산업단지의 경계가 시작되는 곳이다.

이 거리에 서면 먼저 압도적인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눈에 띈다. 높이가 30m는 족히 되고도 남은직한 커다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는 공단 인도를 따라 약 430m 가량 이어진다. 그래서 길 건너 방향에서 바라보면 공장 굴뚝이 바라보이는 것이 아니라 꼿꼿하게 서있는 나무가 보일 뿐이다. 가로수가 삭막하게 보일 수 있는 공장을 가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일종의 울타리이자 방풍림이자 경계병 같은 느낌을 준다.

또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는 인도를 그늘지게 만들며 아늑한 통행로로 만들어 준다. 대형트럭의 통행이 빈번한 대로변이지만 이곳은 그런 느낌보다 쾌적하고 아늑한 산책로다. 최근 도로를 정비하며 더욱 깔끔하게 만들어져 있어 더위를 식히기에도 알맞은 길이 됐다.

2공단을 따라 심어진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공장을 감싸고 있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의 건너편은 주거 밀집지역이다. 선화로를 능선이라고 보면 북쪽에는 주거지역이 있고 남쪽에는 산업단지가 조성돼있는 식이다. 그렇게 양쪽의 능선이 개발되면서 옛 모습의 원형은 거의 사라졌을 것이다. 그나마 선화로를 따라 조성된 작은 도시공원에서 옛 능선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을 뿐이다.

주거지역을 내려다보는 곳에 선화로 변에 길쭉하게 자리 잡고 있는 공원의 이름은 ‘이제공원’이다. 방금 전 다녀온 이제마을이라는 지명에서 따온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꽤 거리가 떨어져 있는 마을의 이름이 붙여진 것을 보면 이 근방에서 이제마을의 영향력이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제공원의 숲길

공원은 주택가와 선화로 사이에 좁은 나무 숲길로 이뤄져 있다. 폭은 20여 미터에 길이는 250m 정도인 작은 공원이지만 선화로 구릉의 옛 모습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유일한 공간으로 생각된다. 길 사이에는 운동기구와 벤치, 쉼터가 조성돼 있어 면하고 있는 주택가에 사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공원이다. 바로 옆 선화로에서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자동차 소리가 끊이지 않지만 나무 숲 사이의 쉼터는 시끄러움을 느낄 수 없는 아늑한 공간이다.

담장이 없으면 길이 태어난다

2공단에서 부송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길

대로변의 공원에서 짧지만 상쾌함을 주는 산책을 경험하고 나온 길은 한마디로 네모반듯한 길이다. 시원하게 뻗은 길과 교차로, 공장지붕과 그 건너편의 고층아파트 등 깔끔한 모습이다. 고개 정상을 사이에 두고 주택가와 공장지역이 뚜렷이 나뉘고 있지만 선화로 변에 세워져 있는 고층아파트에서는 공장지역이 훤히 내려다보일 텐데 그 전망이 어떨까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산업단지 길가에 무궁화가 만발했다

산업단지 내 도로에서 만난 무궁화는 어찌나 그 빛깔이 고왔던가. 무궁화는 7월부터 10월까지 여름 한 철 동안 피고지고 또 매일 새로운 꽃을 피워낸다고 한다. 뜨거운 계절에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무궁화를 산업단지를 돌아 나오는 길에서 만나니 굉장히 반가웠다.

가로수보다 높은 고층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선화로

산업단지에서 선화로를 건너 아파트가 들어선 주택가 길로 들어섰다. 길 이름은 무왕로26길. 선화로를 출발할 때부터 언젠가 만나게 될 것을 염두에 두었던 무왕로가 드디어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그와 함께 선화로를 따라온 여정도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도 된다.

아파트 주택가가 깔끔하게 정리돼 있는 모습

무왕로26길은 아파트와 원룸 등의 주택들이 비탈진 길에 빼곡히 들어서 있어 도시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는 공간이다. 모든 것이 정돈된 느낌으로 어긋난 것들을 용서하지 않는 분위기다. 원룸 앞에 가지런히 놓인 음식물쓰레기 수거용 통만 봐도 참 깔끔하게 정리돼 있다.

아파트에 쪽문이 만들어져 이용되고 있다

인도를 따라 걷다 아파트 담장을 헐어 사람만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쪽문을 발견했다. 이 쪽문도 훌륭한 연결 통로이자 길이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가까운 쪽으로 길을 내 통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았던가. 담을 넘어 다닐망정 돌아서 가기 싫은 고집도 있었다. 애초에 담을 만들지 않았다면 자연스럽게 길이 만들어질 것이었다. 풀이 자라지 못하는 곳을 가장 완벽한 길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것이다.

‘쌍잠자리’는 최선을 다했지만

잠자리가 차량 위에서 비행하고 있다

주택가를 따라 걷노라니 고추잠자리 몇 마리가 날아들어 관심을 끌었다. 벌써 잠자리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니 끝장을 보자던 여름도 곧 기세를 잃을 것 같다. 어느 차량 위를 선회하고 떠나지 못하는 잠자리들을 자세히 바라보니 ‘쌍잠자리’였다. 어렸을 때 흔히 잠자리 암수가 교미하며 알을 낳기 위한 비행을 하는 것을 보고 쌍잠자리라 불렀다.

잠자리는 가까이 다가서도 도망가지 않고 계속 차량 위를 비행하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다 한 가지 깨닫는 점이 있었다. 잠자리는 교미하면서 수면에 스치듯이 비행하며 알을 낳는데 그 잠자리는 차량 위에서 그와 같은 비행을 하고 있었다. 차량이 반짝거리기도 하고 자신을 비추기도 하기 때문에 수면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 그게 아닌데. 어떻게 말릴 수도 없고 말려도 의미 없는 일이 될게 분명했다. 이 여름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계절에 수많은 잠자리들이 도시로 날아들어 그렇게 착각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잠자리 스스로 알을 낳아야 하는 물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정완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