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
<편집자주>
삼거리의 매직파워
황금로가 시작되는 삼거리
오가는 이 많아 활기가 넘치는 읍내. 모처럼만에 파란 하늘을 드리운 하늘은 한풀 꺾인 더위 탓인지 상쾌한 바람을 거리에 불어넣고 있다. 제각각 바쁜 걸음으로 오가는 사람들도 찡그림 없는 얼굴들이고 상점 속 상인들은 한 낮의 분주함을 익숙한 듯 보내고 있다.
오래된 읍내 거리가 늘 그렇듯 왕복 2차선 도로를 지나는 차들은 주차된 차들을 피해 요리조리 곡예운전을 하기 일쑤고, 사람들은 그런 차량을 잘도 피하며 길을 건너다닌다. 물론 횡단보도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일상적인 풍경이다.
길고양이가 골목을 차지하고 있다
길이 좁기 때문에 차가 오가는 사이사이에도 금방 건널 수 있기 때문일 터이다. 차량 통행으로 보면 불편하기 그지없는 이런 길이 쭉쭉 뻗은 너른 길보다 사고가 덜 발생한다는 통계는 그만큼 느린 ‘속도’에 기인할 것이다. 유모차에 의지해 길을 건너는 할머니를 보고 바로 멈췄다가 할머니가 안전하게 벗어난 뒤 출발하는 차량들을 보니 수긍할 수밖에 없다.
복작거리는 길은 삼거리를 만나 더 어수선해진다. 오가는 차량들이 멈췄다 출발하며 소음을 발생시키고 시내버스라도 지나가면 정류장을 향해 뛰는 사람들과 짐을 챙기는 사람들, 일찌감치 도로에 내려서서 손을 내미는 사람들 등으로 일순간 거리는 혼잡해지고 만다. 그런 삼거리에는 약국이나 의원, 슈퍼 등 상점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이들의 대기실 역할을 해주며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도 했다. 길에서 새로운 길이 갈라졌을 뿐이지만 여러 방향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한 읍내 삼거리는 꼭 그런 모습이다.
황등면 중심거리인 황등로에 황등신협이 자리하고 있는 곳에 위치한 황등삼거리도 그렇다. 황등로에서 황금로가 갈라지는 시작점인 황등삼거리는 늦여름을 맞아 멀찍이 높아지고 있는 파란 하늘빛에 물들어 있었다.
황금로가 골드(Gold)길인 이유
옛 하수구 흔적을 지닌 황금로
황금로라는 길은 황등면 정착촌에서 시작해 삼기면을 거쳐 미륵사지 삼거리에 이르는 길이다. 새주소 사업을 통해 길 이름을 정할 당시 황등면과 금마를 잇는 길이므로 황등(黃登)면의 ‘황’과 금마(金馬)면의 ‘금’을 따서 ‘황금로(黃金路)’라고 붙여졌다. 말만 들어도 호감이 가는 익산의 골드웨이(Gold way)가 탄생한 연유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숙이 들어가 보면 애초에 황등면의 ‘황(黃)’은 잘못 전해진 글자였다. 지금도 종종 ‘황등이’라고 불리고 있는 황등면은 과거 오산면 쪽 평야지대와 황등호를 주변 배경으로 하고 있는 ‘큰 등성이’였다. 이에 ‘크다’는 뜻을 가진 ‘한’이라는 말로 ‘한등이’라고 불렀고 이 지명이 어느새 ‘황등이’로 변했고 오늘날 황등면이 된 것이다.
그러니 번쩍거리는 ‘황금’을 뜻하는 길이 아니라 ‘한금로’이라는 이름이 될 수도 있었던 길이다.
그렇더라도 역시 ‘한금’보다는 ‘황금’이 확실히 더 좋은 느낌이다. 더구나 황금로는 더할 나위 없이 황금길이라는 이름을 갖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먼저 황금로는 백제문화유산인 금마면 미륵사지 앞에 닿는 길이니만큼 서동설화에 나오는 오금산(五金山) 황금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오금산도 황금로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만큼 길의 정체성에 부합되도록 연계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또한 이 길은 과거부터 전국에 명성을 떨치던 황등고구마의 유통로였다. 미륵산에서 삼기면을 거쳐 황등면에 이르는 넓은 구릉지에서 생산되던 고구마가 황금로를 따라 황등역으로 모여들었다. 그런 고구마는 황금에 비유할만한 지역 특산품이자 잘 구워진 고구마의 노란 속살이 황금은 연상케 하는 등 여러 점에서 충분히 ‘황금로’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된다.
정착촌의 골목 풍경
삼거리에서 출발한 황금로는 상가건물 뒤편으로 주택가들로 나아가는 골목길들을 껴안고 나아간다. 골목길에 드리운 그늘에 누워 한여름 더위를 달래다 인기척이 나자 일어서 자리를 옮기는 고양이는 한가로운 주택가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골목길을 따라 10여 미터만 들어가도 낡은 집들이 나타나 옛 골목의 풍경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황금로는 포장도로 외에 인도가 없는 좁은 이면도로인데 길가에는 과거 하수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우수와 하수 구분 없이 길가로 난 수로로 쏟아지던 과거에 그 수로를 덮은 콘크리트 덮개돌들이 그것이다. 이 덜컥거리는 이 덮개돌들을 밟고 지나가다 보면 코를 찌르는 시궁창 악취가 올라오곤 했고 정기적으로 돌들을 뒤집어 열고 하수구의 검은 찌꺼기 흙들을 퍼내곤 했던 기억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
황금로 길가를 차지한 상점들도 오래된 모습들, 추억이 깃든 모양새다. 길 입구에서 바로 2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도 지금은 웬만해선 보기 힘든 건축양식일 것이다. 왜 그 당시엔 한 사람 지나가기도 좁은 계단을 당연하게 생각했을까. 보편적 기준이란 것은 시대에 따라 움직이기도 하는 건가보다.
나아갈수록 낡은 거리의 모습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무 집을 상가로 개조한 점포도 눈에 띈다.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아 뿌옇게 먼지가 내려앉았지만 한때는 호황을 누렸던 적이 분명 있었을 것이었다. 세탁소, 문방구, 식당, 목욕탕…, 큰 길에서 갈라진 지 수십 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문 닫은 상가들이 즐비했다. 황등면의 두 가지 큰 줄기인 석재와 고구마 모두 이젠 황등면의 대표산업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탓일 것이다. 이에 유동인구가 줄어들고 주택과 교육여건 등 도시를 찾아 떠나는 인구도 많아지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황등면 정착촌 골목길 풍경
사랑의 종이 울리는 곳
황금로 여정을 시작한 삼거리에서 약 75m 정도 오르막길을 오르면 우측으로 황등10길 골목 안에 황등교회가 나타난다. 이 황등교회는 단순한 종교시설이 아니라 황등면의 근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 공간이자 황등면의 발달을 밑받침한 시설이다.
평양에서 기성의원을 운영하다가 황등에 내려온 계원식이라는 의사는 지성의원을 운영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의술로 사랑을 베풀었고 그렇게 병원에서 기도회로 시작한 활동으로 1921년 황등교회가 설립됐다. 이후 지역사회를 선도해 이끌어가던 교회는 지역민들에게 더 많은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황등중학교와 황등고등학교를 설립해 교육에도 이바지해왔다.
황등교회 전경
황등교회가 사랑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것은 ‘사랑의 종’ 때문이다. 현재 하늘을 찌를 듯 번듯하게 지어져 있는 교회의 길 건너편에 위치한 철탑의 종이 바로 유명한 ‘사랑의 종’이다.
과거 일반적으로 만들어졌던 교회 종처럼 보이는 ‘사랑의 종’은 사실 많은이야기를 품고 있다. 가장 처음 울렸던 종은 일제에 빼앗겼고 이후 광복의 기쁨 속에서 계원식 장로가 기증한 두 번째 종이 교회에서 울리게 됐다. 그러나 두 번째 종은 낭산면에 있는 중리교회로 옮겨지게 됐고 현재 설치된 종은 세 번째다.
'사랑의 종'이 있는 종탑
이 종은 미국 플로리다주의 한 교회에서 사용되던 종으로 1884년에 제작된 종이다. 계원식의 아들인 계일승 목사가 이 종을 기증받아 1950년 배편으로 보냈으나 도중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1년 후에야 도착했고 전쟁 중에 종을 부산항에서 가져오기 위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런 사연으로 황등교회 종에 ‘사랑의 종’이라는 별칭이 생겼으며 올해에는 한국기독교사적 33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정완창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