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수용하면서 보다 탄탄하고 유용한 도로를 만들어왔다. 새 도로와 확장된 도로는 또 도시의 형태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된다. 우리는 그 탄탄대로 위를 자동차에 의탁해 보다 빠르게 달리며 갈수록 넘쳐나는 자동차들을 스치며 각종 신호들을 만나게 된다. 달릴 때나 설 때나 이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도로 위에서, 소통신문은 길을 물었다.

우리가 두 발로 손수 걸을 수 있는 길들은 어디로 갔는가. 누구랄 것이 없이 비켜서야 할 만큼 좁은, 그래서 눈인사를 절로 주고받게 되는 길은 어디로 밀려났는가. 늦은 밤 돌뿌리나 괴한이 걱정돼 가족을 마중나온 사람들이 서성이는 골목은 어디에서 잊혀져가는가. 스마트폰 없이도 바람과 풀벌레 소리,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온갖 삶의 냄새를 찾아나서기로 했다.

우리의 기억들은 작은 길에서 큰 길로 빠르게 빠져나갔지만, 앙금이 된 기억은 어느 길 위에도 남아 있기 마련이리라. 잊어선 안 될 기억들을 만난다면 오늘 소통신문의 막연한 외출이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길은 길 나름의 기억을 지니고 현재와 내일로 연결되며, 길은 곧 사람이니 길과 사람을 길 위에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힐링이 아닐까.

'익산의 길을 따라 소통하다'는 그런 질문들의 출발점이다.

<편집자주>

학생이 우선인 길이었으면

황등초등학교 교문으로 내려가는 길

황등교회의 ‘사랑의 종’을 뒤로하고 황금로에 돌아오면 이내 학교가 나타난다. 황등초등학교와 황등중학교가 사이좋게 교문을 마주하고 있어 보기가 참 좋다. 헌데 안타깝게도 이 앞을 지나는 길에는 인도가 없는 상황이었다. 교문을 나오면 바로 왕복 2차선 도로인데다 학교 인근에서 급격히 휘어져 있는 길 때문에 꽤나 위험해보였다.

대형버스가 수시로 드나드는 길인데 휘어진 길 코너에 반사경을 설치해 놓은 것이 안전조치의 전부였다. 학교를 파한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까불며 뛰어다니다간 사고를 당하기 십상으로 보였다. 초등학교와 중·고교 학생들의 통학로라는 점에서 합격점을 받기 어려운 길이었다.

황등면사무소에 문의해본 결과 통학로 개선과 관련된 민원은 현재까지 없다는 답변이다. 수백 년 동안 오가며 사용해오던 길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 교문을 통하지 않더라도 다른 길이 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겠다.

황등 꿈동이를 키워내는 학교

황등초등학교의 운동장

황등초등학교의 정문은 황금로에서 보면 골목을 따라 50m 정도 내리막에 위치해 있다. 길에서 보면 활짝 열린 교문 안쪽으로 깔끔한 인조잔디 구장이 한 눈에 들어오며 눈길을 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모래 운동장을 겪으며 자랐던 세대들은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새삼 부러운 생각이 들곤 한다.

학교에 들어서서 전경을 바라보자마자 황등초등학교의 역사가 깊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가장 큰 이유는 나무들이다. 오래된 학교일수록 조경수가 우거져 있기 마련이며 그런 환경은 흉내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황등 꿈동이 동상

황등초등학교도 교문에서 교사(校舍)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가 우거진 모습이다. 진입로를 따라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런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초등학교 교정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각종 동상들도 녹음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중 옆구리에 책보를 끼고 서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황등 꿈동이’ 동상은 강한 인상을 주기 충분했다. 굳게 주먹을 쥔 양손에서 배움에 대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황등초등학교의 학생들도 꿈동이 동상처럼 강인한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다.

세계 최고의 화강암과 신비한 나무

교정을 둘러보니 예상대로 학교의 역사는 길었다. 지금은 역사관으로 고쳐 쓰이고 있는 옛 건물 앞에 세워져 있는 기념비를 만났다. 돌 빛깔만 봐도 오래돼 보이는 첫 번째 기념비는 ‘개교60주년’이고 그 옆에 상대적으로 환한 빛깔의 기념비는 ‘개교80주년’이다. 80주년 기념비가 2007년에 세워졌으니 황등초등학교는 이래저래 90년 역사를 품고 있는 학교다.

1927년 개교해 쓰이던 옛 교사는 수리 되어 현재 도서관과 역사관으로 쓰이고 있었으나 석조 구조물로 만들어진 근대 건축물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이었던 그 당시에도 화강암으로 유명한 황등면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양질의 화강암을 사용한 건축물로 교사가 지어졌고 현재까지 튼튼한 모습으로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 이외에도 국기게양대 등 여러 곳에서 화강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세계 최고의 화강암을 생산하던 황등면이라는 정체성이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나무가 우거진 황등초등학교의 교정

황등초등학교의 옛 교사

황등초등학교에 쓰인 화강암에 관심을 보이며 교정을 둘러보는데 행정실 선생님 한 분을 만났다. 반가움에 인사를 건네며 방문한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선생은 꼭 보여줄 것이 있다며 교정 안 뜰로 안내해 주었다. 구 교사 뒤편으로 돌아가자 나타난 정원에는 정말이지 신비로움 그 자체를 내뿜고 있는 어마어마한 나무가 있었다.

“우~와!!!” 입이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신비로운 나무였다. 신축 교사 전면에 자리하고 있는 그 나무는 황등초등학교의 교목(校木)으로 수종은 ‘히말라야시다’인데 그 형상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모습이다. 30m가 넘는 웅장한 모습으로 자란 나무는 지상에서 얼마 동안은 곧게 자라다가 3m 정도 위에서 부터 수십 갈래로 갈라진 후 다시 가지 하나하나가 하늘로 곧게 뻗어나가 마치 한 나무 위에 십여 개의 나무가 자라고 있는 형상이다.

안내를 해주신 선생에 따르면 개교한 1927년 정도에 심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길어야 100년 정도의 수령이라고 한다. 히말라야시다가 잘 자라는 나무이기는 해도 이런 모습으로 자란 곳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뿌리에서 나와 가지들이 모두 잘 뻗어나간 나무의 형상처럼 이 학교에서 배우고 자라는 학생들 모두가 크게 성장해나갈 것 같다는 감상을 전했다.

문방구는 아이들 사랑방

교정 한편에 가꿔 놓은 맨드라미

황등초등학교 교목이 자리한 안 뜰

황등초등학교의 교목을 실컷 감상한 뒤 돌아서니 붉은 맨드라미가 시선을 붙잡았다. 유독 초등학교에서 많이 심는 것 같은 맨드라미는 맑은 날씨 덕분인지 더욱 붉게 빛났다. 이어 교정을 나서며 만난 가로등에도 절로 관심이 일었다. 언뜻 보면 영락없는 소나무였지만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어진 가로등이었다. 이런 아이디어는 되도록 널리 쓰이는 것이 모두에게 이로울 일이다.

볼 것도, 이야깃거리도 많았던 학교를 나서니 언제나 그렇듯 교문 앞에는 문방구가 자리하고 있다. ‘황등서점’과 ‘경영문구’가 일종의 숙명의 라이벌인 것처럼 길 건너 코너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중 더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황등서점에 들어가 보니 아주머니가 다정한 얼굴로 손님을 맞는다. 이 자리에서만 40여 년 동안 학생들을 상대로 문제집과 준비물, 각종 학용품 등을 판매했다는 아주머니가 황금로에 대한 옛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황등서점의 사장님

“여기서 장사를 시작할 때만해도 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였는데 차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가 들이쳐서 아주 고생했었어. 그러다 길이 포장되면서 조금 넓어진 것 말고는 크게 달라진 것도 없어, 그대로야 길은.”

길은 추억의 바람을 불어왔다. 지금처럼 낡은 가게가 아니었던 시절에는 너도나도 황금로를 따라 고구마 순이며 고구마를 지고 이 길을 오갔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이 일상이었고 코흘리개 아이들도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그렇게 자주 가까이서 자라는 것을 지켜보던 아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군복을 입고 찾아와 ‘고맙다’는 말을 해주면 보람이 샘솟는 느낌이다.

추억의 뽑기를 해보다

경영문구가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다

학교 앞 문구점에는 필요한 물건을 팔기도 하지만 오락게임이나 뽑기와 같은 놀이시설도 갖췄기에 아이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두꺼운 도화지에 수백 개의 뽑기 종이가 박혀 있어 자신의 운을 시험할 한판 승부를 할 수 있는 뽑기판이 사용되고 있었다.

황등초등학교 앞 경영문구점에는 동전을 넣고 돌려서 캡슐을 뽑는 뽑기 기계가 여러 대 있어 관심이 갔다. 그리고 이내 아주 오랜만에 한번 해보기로 마음을 먹고 기계 앞에 앉았다.

어느 기계에 관심이 가는 물건이 있는지 기계 앞면을 바라보며 충분히 고민한 후 한 기계를 선택했다. 그 다음은 2백 원을 넣고 우측으로 힘차게 돌렸다. 드르륵, 기리릭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캡슐을 두근거리며 열어보니, 만화캐릭터가 그려진 딱지가 나왔다. 이런 물건이면 ‘꽝’이라고 할 만해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 번 더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는 순간이었다.

정완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