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밥보다 소중한 가치, 지자체에서 지켜내야"

"익산은 문화적 두께가 엷고 시민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도가 낮습니다." 익산 예총과 이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이 처한 현실을 무 자르듯 간추리는 김영규(66세, 익산시 중앙동 평동로 9길 71) 회장의 건조한 표정에 얼핏 자조의 빛이 스쳤다.

얕은 실개천에는 큰 고기가 없는 법인데, 홍대 미대(서양화)를 졸업할 즈음의 젊은 그는 넘치는 에너지를 고향에 쏟고 싶었다. 그러나 깊고 넓은 강을 거슬러 회귀한 그는 지역이 지닌 한계를 절감할 수 밖에 없었다. 열심히 살다보면 조금 나아질 것이라는 '미련'에 그는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열정이 들끓던 시절 김영규는 온전히 화가였다. "나는 화가인가 교육자인가"라는 내부의 날선 질문은 그로 하여금 대학원에 진학해 실력을 쌓게 했고, 5년간의 이일여고 교사생활을 접게 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대학 강단과 작업실을 오가면서 여전히 생활인과 화가의 모호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한경쟁에 내몰린 대학들은 앞다투어 경쟁력이 떨어지는 학과들을 교과부의 보조금과 맞바꿨다. 그 바람에 그가 8년 동안 전임으로 출강했던 전주대 미술과는 2008년 폐지됐고, 설자리를 잃은 교수들이 나서서 설치한 전주대 사회교육원에서 9년 동안 강의를 맡아오고 있다.

"인간 생활의 중심을 관통하는 순수미술이 왜 이지경이 됐을까. 순수미술을 전공하는 이들은 국내 유수의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을 못하는 까닭이 뭘까. 그 해답은 단순합니다. 모든 문제는 경제논리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지역 예술의 현실도 경제여건과 밀접한 것입니다. 이제 미술은 산업과 결부됐을 때만 존재가치를 인정받게 된 거죠. 지자체를 이끄는 사람들이나 시민들의 예술에 대한 사고방식도 거기에 맞닿아 있는 겁니다."

언제부턴가 수용하기 힘든 낯선 정서가 지역사회 바탕에 짙게 깔렸다. 익산 예술인들의 수장으로서 김영규가 말 할 수 있는 건 시민들 앞에서 투명인간이 된 예술인들의 처지와 그 현실에 고정된 시선들 때문에 지역을 떠나는 실력있는 사람들, 그리고 남아있더라도 좋은 여건을 만들 능력도 없는 지역예술인들의 민낯 뿐이다.

익산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예술인들은 각기 다른 다양한 생업에 매달려 있다. 김영규 역시 25년의 교직 생활과 이직, 실직과정 전반에서 건물 인테리어나 간판 디자인 같은 산업분야에 순수미술의 공력을 쏟아부으며 생계를 영위해 왔다. 이 과정에서 그리는 것은 만드는 것과 똑같다는 예기합일을 체감하기도 했다.

인간에게 정서란 행복으로 가는 길이고 착한 품성의 벼리인데, 이렇게까지 각박해진 정서 앞에서 그는 걱정이 태산이다. 익산이 조폭도시의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피폐화된 정서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예체능 쪽에 몰두하며 끼를 발산하는 아이들이 반사회적으로 성장했다는 말을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개를 길러 본 사람은 개고기를 쉽게 먹지 못합니다. 집에 그림이라도 한 점 걸어 놓은 사람은 예술을 가볍게 여기지 않겠지요. 지금과 같은 치열한 생존 환경에서는 사람이 미처 돌아보지 못하지만 어떨 땐 밥보다 소중한 가치를 자치단체에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리더들의 집에도 자신이 아끼는 그림이 걸려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이유를 대서든지 문화예술 예산을 깎으려고만 드니까요."

만남이 너무 무거워졌다. 그럼 김영규는 왜 여전히 화가인가가 궁금해졌다. 환경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불행할 수 밖에 없는지도 듣고 싶어졌다.

"아닙니다. 예술인도 경제적인 동물의 범위를 떠날 수 없지만, 조그마한 가치관과 철학이 있다면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러니이지만, 예술은 경제적인 부를 누릴 때 오히려 부작용을 만나기 십상입니다. 미술은 내게 있어 삶의 방향성입니다."

김영규는 자신의 미술 세계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보는 시선'이라고 했다. 대학에서 미술학도가 배우는 해부학도 결국 겉에 드러난 표정이나 형태가 어떤 근육의 연동에 의한 것인지, 그 근원에 있는 어떤 마음에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듯이, 그는 노인의 주름진 얼굴 내면 같은, 사물이 지닌 근원에서 아름다움을 추출하는 것이 자신의 작업이라고 소개한다.

김영규가 건넨 자신의 개인전 도록에는 사각 공간 안에 깃든 단청 위로 파격의 선들이, 혹은 에너지의 선들이 교차하거나 피어 오르고 있다. 거기 단청의 강렬한 색채와 선의 활력은 생동하며 따사로운 봄날의 향연을 자아내고 있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유한한 아름다움이 아닌 영원한 것, 또는 인간이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아서 유전자에 새겨넣은 '사랑'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기 위해 화폭을 응시했을 그의 시선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공인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