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몰래 보듬은 아픔을 주름에 묻고 환한 미소를 짓는 사람 
"보리를 심을 걸 좀 편하자고 총채보리(젖소 사료)를 심었는디 가격차이가 너무났어요. 필지당 200만원은 나와야 타산이 맞는디 80만원도 안나왔슨께요. 손이 더 가더라도 내년부터는 보리를 심어야겄어요" 평범한 농사꾼 김희중(59세, 춘포면 용현리 671-8번지) 씨는 생각이 많다. 기왕에 흘린 땀이 제 값을 받지 못할 때 억울하다. 효율을 생각하고 변화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신경울 곤두세우는 것은 그래서 습관이 되었다. 그가 터를 잡고 사는 용현리 일원은 밭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논 일색이어서 선택할 농사일의 폭도 좁다. 김희중은 50(1필지, 1,200평)필지의 논을 경작하는 대농에 속한다. 고령화와 이농현상 때문에 40필지의 논을 임대할 수 있었지만, 그 때문에 일손이 없어 바쁜 모내기철에는 시내에 있는 인력사무소에서 사람을 구해야 한다. 대농은 수확할 때 더 막막해진다. 농자재나 인건비로 들어간 돈을 생각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내 땅 열필지가 있어서 버티지 안그러면 힘들어요. 벌써 임대 논 세가 절반인께요. 그래도 규모가 되니까 자식들 다 대학 보내고 여웠지, 인자 농촌에서는 제 땅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그는 그런 실정을 말하면서도 환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다. 그 미소에서는 28년 동안 성실하게 삶을 일궈 온 자부심 그 이상이 배어난다. 농사일은 아무래도 고되고 보상은 미미하지만, 땅이 주는 정직한 대가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고 다른 가치로는 가늠할 수 없는 보람과 기쁨이 있다는 듯이, 그러나 흙을 만지고 흙에서 결실을 맺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런 땅의 매혹을 모른다는 듯이. 그렇지만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그는, 막연하게 농촌을 동경하는 사람들에게 현실은 냉혹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환갑을 목전에 둔 자신도 부가가치가 높은 복합영농(하우스 시설재배) 같은 진취적인 꿈들을 내려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세월이 흐를 수록 하늘은 높아만 가고 자신은 점점 더 왜소해져가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4년 전에 정부지원을 받아서 한 필지에 대형 하우스를 설치해 토마토를 심었는디, 농한기에 본 농사 20필지에 버금가는 수익을 내고 있어요. 나이들어서 딱 하기 좋고 실속있는 일 같아서, 논 농사를 줄이고 하우스를 늘려 열대과일 같은 특작을 해봐야지 했는데 어느새 내 나이가 이렇게 된 겁니다. 갈수록 힘에 부쳐요.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아요" 그러나 김희중의 깊이 패인 주름에서는 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체념에서 얻어진 달관, 그것이 환하게 빛나는 이랑 이랑에는 한 걸음에 한 숨 두 걸음에 눈물이던 시절의 자취가 깊이 묻어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아픔을 남몰래 보듬어 살아냈을 한 생애를 내색조차 하지 않는다. 음주가무를 너무 좋아했던 아버지가 살림을 다 거덜냈을 때, 할아버지 전 재산을 팔아 다섯 필지의 논을 마련한 것이 농사의 시작이었다. 1남 4녀를 슬하에 둔 그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울컥, 눈물로 꺼내 보여줄 아픔이 어찌 없었을까. 하지만 그는 끝내 담담하다. 남을 걱정하는 마음에서나 그의 마음을 단편적으로 읽을 수 있다. "우리 마을에 귀농한 사람들이 셋이 있는디, 두 사람은 시내 인력사무소에 나가 막노동을 하고, 남은 한 사람은 코딱지만한 땅뙈기에 목숨을 붙이고 살지요. 이 동네는 논밖에 없슨께 뭣이 있어야 사는데 빈 주먹으로 뭣을 하겄어요. 공기좋고 경치좋은 전원생활을 귀농으로 생각했다가는 낭패 당하기 십상이지요. 농사는 냉혹한 현실입니다" 김희중은 용현리 농가에서 두번째로 어린 축이다. 그래서 이장을 맡게 된지 벌써 5년이 됐다. 동네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운 덕분에 농촌 밖 세상과 가까워지고 소통할 수 있는 것은 또다른 즐거움이다. 익산농협과 원협 대의원직도 맡고 있는 그가 마을 사람들의 농협 일과 동사무소 일을 거들 때 신명나는 이유다. 근래에는 만경강 제방과 붙어있는 용현리 마을 이장으로서 대책회의를 꾸려 강 안쪽으로 설계돼있는 자전거길을 제방 위로 올리고, 익산 쪽 퇴적토를 전주 쪽으로 가져가려는 것을 막아 익산 쪽 제방에 붙이도록 한 보람도 있다. 돌아보니 그는, 자기의 인생이 그렇게 가치없거나 비참하지만은 않다는 걸 확인하고, 자신의 삶을 치하하고 존중하는 곳에서 살아보고 싶어하는 사람들 속에 있다. 일년에 한 번씩 여는 마을잔치를 통해 마을 사람들의 그런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악기를 가진 후배들을 거리낌 없이 불러 흥을 돋우고 마을 사람들과 어울릴 때 공동체란 삶의 의미를 두텁게하는 또다른 축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김희중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노동의 고단함을 서로 덜고 흙과 땀 속에 삶의 여러 국면들을 차곡차곡 버무려 흐뭇하게 끌어안을 수 있었다. 특히 그의 아내 유은자(55세) 씨는 김희중이 살을 붙인 가장 가까운 흙의 숨결이다. 그는 아내의 지극한 사랑을 통해 착하고 참다우며 결 고운 농사꾼이 된다. 공인배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