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철학자 윤구병
1943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 서울로 이사가 6.25전란을 겪은 후 다시 농촌으로 내려왔다.
서울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철학박사)하고 월간 '뿌리깊은 나무' 초대 편집장, 충북대 교수<철학과>를 지냈다.
1995년 정교수를 그만두고 전북 부안군에 내려와 대안학교인 변산공동체학교를 세웠다.
2005년부터 민족의학연구원을 설립,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08년 법인으로 등록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는 부안에서 토막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저술과 강의를 통해 생명공동체의식을 확산시키고 있다.
저서로는 ‘개똥이 그림책’, ‘당산 할매와 나’, ‘변산공동체학교’,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흙을 밟으며 살다’, ‘꿈이 있는 공동체 학교’ 등이 있다.
윤구병(67) 선생은 짙은 남색 고무신을 신고 수수한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다.
로션을 바르지 않은 것 같은 거친 손은 농부의 것이었다.
그는 투박하고 동네 아저씨 같은 얼굴을 가진, 영락없는 농사꾼이었다. 하지만 태도는 차분하고 안정적이었다.
눈동자는 강렬한 생동감을 품으며 번쩍이고 있었으나, 오기를 찾아볼 수 없는 선량한 열정이 깃든 것이었다.
만 67세. 당년 일흔이 가까운 나이었지만 얼굴은 젊어보였고,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선비의 모습을 갖고 있었다.
인터뷰는 17일 오전 11시경, 익산시 영상미디어센터 2층 야외 벤치에서 이뤄졌다.
■지금 하고 계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2년 전부터 보리출판사 대표를 맡아오고 있습니다. 15년 전 변산공동체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제자에게 그곳의 운영을 맡기고 인근에 집을 지어 살고 있습니다. 올해 5월까지는 민족의학연구원 이사장을 지냈죠. 민족의학연구원은 남과 북, 중국의 전통의료기술과 지금까지 쌓아온 수많은 임상경험을 갖고 의료백과전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단체인데, 2008년 법인으로 등록했습니다. 지금은 이사장직을 그만 두고 변산에 있는 산 속으로 들어가 나무하고 농사짓고 사는데, 내년에는 약초밭을 가꿀까 생각중입니다.
■국립대 교수직을 버리고 농촌으로 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변산으로 내려오기 전 15년간 교수(충북대 철학과) 생활을 했습니다. 마지막 4~5년 동안은 정교수로 지냈고요. 65세까지 정년이 보장된 국립대 정교수가 얼마나 특권층인지 잘 아시죠? 연구논문을 안 써도 되고, 강의도 일주일에 9시간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서양철학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정말로 하고 싶은 질문은 하지 않고 상투적인 질문에 상투적인 답변, 이런 것들에 대해 넌더리가 났습니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적어도 옛날에는 삶에 대한 절실한 질문에 매달렸고, 깨닫기 위해 노력했는데, 지금 교육은 뻔한 질문과 답변, 그리고 공부 목적은 단순히 졸업장을 따기 위한 것으로 전락하지 않았습니까.
계속 이런 교육을 해야 하나 자괴감이 들더군요. 교육이 중요하다는 게, 옛날 제 아버지가 저에게 농사꾼이 되라고 하셨어요. 그 교육효과가 40년 이후에 나타난 거예요.
■선생님께서는 현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특히 현대인들의 삶에 관해서요.
제 생각은 휴머니스트에서 출판한 네 권의 책에 나와있습니다.
요컨대 지금 세상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교육이 문제입니다. 공동체적 삶을 가르치지 않고 남을 딛고 올라서는 기술, 좋은 대학가서 남의 집 종살이 시키는 기술, 금융투기하는 기술을 가르치고 있어요. 이대로 가다간 애들 다 죽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에 미래가 없어요. 애들이 지금 강시, 좀비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갖고 꾸준히 교육민주화운동도 펼쳐왔지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입니까.
교육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내용과 형식이 변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두 가지라고 봅니다.
첫째는 사람도 다른 것들과 똑 같은 생명체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이고, 생명체로서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생명체는 홀로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에 공동체적인 삶, 상생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런 생각과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의 몸을 보더라도, 내가 신는 신발, 옷부터 시작해 다른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것이 없잖아요. 그래서 서로 돕고 서로 어울리는 것을 가르치는 게 교육의 목표인 것입니다. 경쟁이 아닌 협력을 가르치는 것이지요.
이게 변산공동체를 만들기 전부터 생각했던 목표입니다. 보통 변산공동체 같은 곳이 자리를 잡으려면 30년이 걸린다는데,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자녀 이렇게 삼세대가 어울려 있어야 제대로 된 교육환경이 조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시는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농촌에서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제 15년 지났으니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변산공동체 같은 곳이 많이 생긴다면, 공동체적인 삶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현재 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어린이들의 자발성, 자율성을 박탈시키고 생명력이 없는 아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서 즐거움을 빼앗고 손발은 움직이지 않은 채 머리만 굴러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교사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어린이들을 집단학대 하고, 이를 넘어 집단 학살로 가고 있습니다.
■대안교육기관인 변산공동체 학교는 어떻게 운영됩니까
어른들이 20여명, 고등학생 8명, 중학생 13명, 초등학생 13명 등 5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숙사가 없어서 더 못 받고 있어요.
2만여평의 농사를 손수 지으며 공동체적 삶을 살고 있는데, 보통 유기농법이라고 하면 무농약, 무비료라고 하는데, 우리는 여기에 퇴비를 만들어 땅에 뿌리기 때문에 축산분뇨로 만든 것을 쓰지 않고, 비닐도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법을 씁니다. 축산분뇨로 만든 유기질비료나 비닐을 사용하면 진정한 유기농법이라고 할 수 없죠.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이 농사짓는 법을 그대로 하는 겁니다. 트랙터 같은 기계는 거의 쓰지 않고 오직 쓰는 것이 있다면 경운기 정도입니다. 소를 길들여 밭갈이를 시키는 데 길들이가 참 어려워요.
아이들은 일반학교에서 하는 제도교육은 받지 않습니다. 물론 아예 안 배운다는 것은 아니고요, 오전에만 공부합니다. 이것도 억지로 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수업이 끝나면 아이들은 산과 들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농사도 거들고 그야말로 살아 있는 교육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인증 받은 교육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방학 때는 검정고시를 위한 교육을 받습니다. 국영수를 비롯해 역사, 철학, 인문학 등도 다양하게 배우지요. 만권이 넘는 서적이 있어 책을 읽으며 서로 토론하기도 합니다. 교사들은 이곳 어른들이 돼 주는데요, 지역에 있는 전문가들도 교육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평소 때는 2주에 한 번씩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들이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대학교수, 작곡가, 화가, 제빵사 등 여러분들이 도와주고 있지요.
■변산공동체학교 사업을 하면서 느낀 점은 무엇입니까. 혹시 어려운 점은 없으셨습니까. 생각과는 다른 현실 같은 것 말입니다.
예. 있었지요.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습니다. 제가 교수로 있을 때는 이렇게 인간관계가 어려운 것인지 몰랐습니다. 도시에서는 근무시간에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끝나지만, 이곳은 숨을 곳이 없습니다. 달아날 곳이 없어요. 사소한 의견 차이 때문에 나오는 건데요, 제가 독일의 한 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하는 말이 인간관계 때문에 사람들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이란 게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아주 작은 것들이지요. 예를 들면 감자를 심을 때 어떻게 심으면 좋겠다든가 하는 것들입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저 사람은 저렇게 심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런 작은 것들에서 갈등이 생기는 것이지요. 나름대로의 가치관, 신념, 경험 등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세 명중 두 명은 남으니 그래도 성공한 것이지요.
우리가 짧은 경험 속에서도 이렇게 성공한 것은 아마도 조상 때부터 형성된 공동체의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보았습니다.
■변산공동체의 교육방법이 보편적인 교육의 대안으로 채택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아주 훌륭한 교육방식이긴 하지만 보편적으로 되기는 힘들 거예요.
아마 많은 사람들은 위기가 닥쳐야, 가혹한 시련을 당해본 후라야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눈을 뜨게 될 겁니다.
조금 있으면 10명중 9명은 농촌으로 돌아가 생산 활동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식량의 위기가 그렇게 만들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의 교육을 이대로 두면 전 세계 젊은이들을 몸을 사용하지 못하는 병신으로 만들 것이고, 아마도 위기가 닥치면 생산 활동에 투입하지 못해 큰 일이 일어날 겁니다. 사회가 바뀌어야 교육이 바뀌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변산공동체에서 하고 있는 교육이 보편화되기 어려울 거예요.
■교육계에서는 수월성 교육, 조기교육, 영재교육 등을 운운하면서 1명의 영재가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기교육이 필요한 것은 딱 두 가지예요. 걸음마 교육과 말 교육입니다. 걸음은 빨리 걸으면 좋고, 말도 빨리 배우면 좋지요. 나머지 것들은 조기교육을 시키면 시킬수록 좋지 않습니다.
육체와 정신에 모두 해로워요. 한국의 천재라고 해서 기네스북에 오른 김웅용씨(아이큐210)가 충북대에서 몰래 공부했는데, 그가 평범한 아이로 돌아온 것은 다행입니다.
비상한 기억력은 천재성의 발휘가 아니에요.
그런 사람은 노벨상 수상자 중 한 명도 없습니다.
한 명이 수백만 명 먹여 살린다는 말은 사기입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수백만을 먹여 살립니까. 그리고 누가 누구를 먹여 살린다는 것입니까. 한 명의 영재가 돈을 그만큼 많이 벌 수 있다는 얘긴데, 현대 사회의 모든 문제는 돈 때문에 일어나고 있어요.
금융투기 때문에 한 나라가 거덜 나지 않습니까. 돈 버는 재능, 남의 것을 빼앗고 착취하는 재능을 ‘먹여 살린다’라는 걸로 표현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교육은 평소의 철학과 무관치 않은데요, 사람과 사물과의 관계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서로 살리는 것이지요. 상생하는 겁니다. 도토리나무가 왜 도토리를 그렇게 많이 땅에 뿌리느냐 하면, 그 도토리는 다람쥐가 먹기도 하고 땅에 뿌려져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기도 하고, 짐승이 먹어서 똥을 싸면 땅에서 부패되고 해서 토양을 기름지게 한 다음 건강한 도토리 하나만 좋은 나무로 성장하면 성공한 것이 된다, 이런 겁니다.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른 생명을 위해 썩는 거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생명체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고, 결국 이런 생명체들은 서로 상생하며 사는 것이거든요. 자기 하나로만 삶을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농기계를 안 쓰는 이유도 그거에요, 농기계 너무 많이 쓰면 논밭에 있는 생명체가 죽어요. 우리가 살기 위해 꼭 살생해야 하는 것만 빼놓고는 살생하지 말자는 얘기죠.
■삶의 방식이나 태도에 대해 후학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또는 충고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충고는 할 수 없고요, 다만 나는 나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람은 생명의 기운이죠. 목숨은 숨과 숨 사이에서 붙어 있는 것인데, 숨을 쉬게 해주는 바람님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입니까. 우리 몸 속 피에 많이 섞여 있는 물, 내입 속에 들어오는 물님이 고맙고, 따뜻하게 해주는 불님이 고맙고, 햇빛님에게 감사하고, 먹을 것을 기르고 내 발을 디디게 해주는 땅님이 고맙고, 그렇게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나는 살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서양철학자였는데, 지금의 철학은 무엇입니까.
내가 전공한 서양철학은 사람과의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철학입니다. 그래서 서양철학은 논쟁술, 수사학, 논리학, 증명 등을 가르치지요. 남에게 이기기 위한, 남을 죽이기 위한 기술입니다. 관념철학을 보면, 우리의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철학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자연과 인간, 모든 생명체가 상생이 되게 하기에는 아직도 무지몽매한 상태입니다. 또 지금까지의 인문학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되었죠. 철학, 사회과학, 인문학, 과학, 이 모든 것들이 투쟁하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 활용된 것이죠. 이제 그러지 말자는 겁니다. 모두 공멸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상생으로 가야죠.
인터뷰, 정리 = 김경선 기자
고은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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