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홍

협동사회연구소 대표

지역에서 열 일하시는 선배가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다고 추천해주셨다. 김형수 시인이 지은 김남주 평전이었다. 책장을 넘기며 그의 삶과 김형수 시인의 이야기에 깊이 매료되었다.
요즘 뭇 정치인들의 언행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참이었다. 민주주의를 위한 수많은 희생과 투쟁의 결과가 고작 오늘의 현실이란 말인가? 자괴감과 분노도 가슴속에 켜켜이 쌓이고 있던 참이었다. 갈 길은 멀고 내일의 숙제는 크기만 한데 한 걸음 전진은커녕 맨 날 졸렬한 싸움과 퇴행으로 이어지는 날들이다. 참여형 정당개혁, 정치개혁 운동이 2000년 초부터 본격화되었다면 지난 2020년 준연동형 선거제도 개혁은 20년 운동의 성과로서 정치 전환의 큰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거대 양당의 위성 정당으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난 후 깊은 배신감과 무력감, 목숨을 걸고 싸워서 막지 못했다는 회한과 반성의 심연 같은 시간들이었다.
김남주 평전이 오랫동안 침잠해있던 온 몸의 세포들을 깨우는 느낌이었다. 김남주 시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80년대 초 대학 시절 그의 시집 진혼가를 통해서였다. ‘총구가 내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 나의 신념은 혀가 되었다.....어설픈 나의 신념 서투른 나의 싸움은 참기로 했다.....온몸으로 죽음을 포옹할 수 있을 때까지는....신념이 바위의 얼굴을 닮을 때까지는...’ 박정희의 비상계엄에 대한 투쟁으로 처음 체포되었을 때 형사의 권총 무력시위와 고문에 공포를 느끼고 존엄이 무너진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짧은 시였지만 동병상련의 공감과 처절한 전율을 느꼈었다. 그의 절망과 좌절, 투쟁과 실천 의지가 생생하다. 그의 시는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던 청춘들에 죽창 같은 무기가 되어주었다.
지난 한 달간 김남주 평전에 푹 빠져 여러 번 읽고 있다. 김남주는 농민의 아들이고, 농민운동가였다. 아버지는 농사를 인생의 시작이자 끝으로 알고 거기에 모든 걸 거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공부 잘하는 둘째 아들이 판검사가 되기를 바랬다. 하지만 김남주는 출세주의, 엘리트주의, 능력주의를 경멸했다. 김남주는 진정한 민주주의자였다. 만인의 자유와 존엄을 위한 길에 모든 것을 걸고 싶어 했다. 그럴 때 진정한 자유라고 생각했다. 이웃들에게는 키 작은 물봉이었고 국가권력 앞에서는 거침없는 거인이었다. ‘인간이 탐내는 저마다의 욕망을 자극하는 모든 감정을 삭이면서도 소외된 자의 연민과 존엄에 가해지는 모욕 앞에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히 응대하고 마는 이 한없이 겸손하고 한없이 격렬한 특이자의 정신적 원형은 무엇일까?’라고 김형수 작가는 묻는다. 광주는 무등산 아래 들어선 하나의 마을공화국이라 해도 된다. 이 지역의 상징적 인사들이 연이어서 만들어 낸 공동체를 향한 압도적인 헌신의 힘이 아닐까라고 진단한다. 임방울, 최흥종, 허백련, 오지호, 김현승 등등.  김남주는 동학혁명과 뗄 수 없는 해남 농부의 아들이고 무등산 광주 마을 공동체의 아들인 것이다. 김남주의 의형제 최권행은 “언제나 유쾌하고, 언제나 장난스럽고, 언제나 지적 세계를 명증하게 논파하면서도 단 한 번도 지식인의 포즈에 빠져들지 않는 선배의 온기”를 증언한다. 김남주의 평생 동지 이강은 이웃들이 흔히 생각하는 물봉 인상과 달리 실제 김남주는 매우 섬세하고 용의주도하며 어려운 문제를 풀 줄 아는 성품이라고 말한다. 김남주는 1977년에 광주 민중문화연구소를 열고 소장이 된다. 김남주가 연구소를 중심으로 민중문화를 보급하고 광주 후배들의 학습팀을 떠맡게 되면서 광주의 운동권은 가족 공동체가 되었다. 1970년대말 김남주는 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 등의 제 3세계 민족해방운동에 대해 정통해 있었다. 한국에도 국제사회와 연대할 전선 조직이 살아 있어야 하고, 그곳에는 누군가 목숨을 걸고 조직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남민전’에 가입하여 누구보다 치열하고 투철하게 활동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에는 담대한 조직과 활동의 시도가 너무 적고 거기에 총력을 기울이는 사람이 너무 없다고 생각했다. 김남주는 “사람은 싫거나 좋거나 칡나무처럼 서로 얽혀서 살 수밖에 없는 사회적인 존재이다.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인간은 보다 인간다운 삶의 터전을 준비하기 위해 공동체의 다른 성원들과 생사고락을 나눠 가질 때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고 했다. 그는 억압이 있는 모든 곳에서 만인을 위해 싸울 때 나는 자유라는 표현을 셀 수 없이 강조한다. 김남주는 전사였다. 1979년 10월 4일 체포되어 60일간의 혹독한 고문 수사 끝에 투옥되고, 징역 15년이 확정되어 80년 12월에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 와중에 전두환의 쿠테타와 80년 5월 피비린내나는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다. 김남주와 함께 공부하고 활동했던 광주의 많은 후배들이 광주민중항쟁의 전선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해갔다.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윤상원 시민군 대변인도 그런 후배였다. 9년의 옥살이 후 세계적인 석방운동에 힘입어 1988년 출소한 날 광주 망월동 묘지에 윤상원의 영정을 들고 찾아간다. 9년이 넘는 옥살이는 가혹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그 환경에서 써낸 300편이 넘는 시들은 시대의 자산이 되었다.
김남주의 시에 대한 김형수 시인의 정리는 가히 절창이다. ‘김남주의 시는 대지에 서 있는 것 자체로 자유인 자, 현실의 이념이든 체제든, 물리적이든 추상적이든, 벽이든 폭력이든, 그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싸우는 자, 그 모든 압제와 대결함으로써 존재의 위엄과 고귀함을 얻는 자의 미학적 실체를 아낌없이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 자유를 향하여 전 존재를 내던진 자, 사적 소유로부터 멀찍이 벗어나 버린 자, 개인적 욕망을 아예 포기한 자만이 다다를 수 있는, 자아를 완벽하게 연소했을 때 나오는 하얀 불꽃, 말 그대로 백열하는 불꽃을 보여준 것이다. 1980년대는 김남주의 출현으로 비로소 광주민중항쟁의 시대에 맞는 정신적 높이와 문학적 호흡을 확보하게 된 셈이다.’
김형수 시인은 익산 북콘서트에서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전선이 없는 시대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움과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김남주평전 일독을 권한다. 특히 정치인들은 그의 삶과 시를 깊이 음미해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