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칼럼 > 383호 겨울산행

383호 겨울산행

편집국장 공인배

그렇다. 겨울 준령행은 누군가와 함께 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홀로 분투하는 것이지만, 오르는 동안 자기도취의 선경(仙境)을 만끽하는 것이지만, 저 위에 올라 운무 속에 굽이치는 산맥들을 내려다 보거나 눈 덮인 잔솔 숲을 지나온 바람을 맞이하는 감흥은 오직 자기만의 것이지만.

대개 그러하듯 나에게도 산행(山行)은 일탈이다. 도시를 등지는 것, 일상의 생각을 멈추고 관계를 벗어나는 것, 궁극적으로는 그 모든 의도 자체를 잊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지는 산 아래에 도착할 때까지면 족하다.

산을 오르는 순간부터 목적을 되새길 겨를은 없다. 그러나 산은 나를 끈질기게 추궁한다. 땀이 흐르고, 숨이 차오르고, 몸이 무거워지면 그걸 극복하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이 개입할 여지란 없다.

나는 침묵하는 산의 지시를 따른다. "다리에 힘을 모으라. 허리로 몸의 흔들림을 잡으라. 눈 혹은 오감을 사위(四圍)를 향해 곤두세우라" 이런 긴장은 험준한 겨울산을 오를 때 더 배가된다. 최적화를 위한 몰입이란, 악조건일수록 강렬해지며 순도가 높아지기에.

얼어붙은 지면은 착지를 배려할 줄 모르니, 걸음걸음 찰나의 모든 순간들에 중력을 지탱해야 한다. 호흡을 고르고 정신을 가다듬기를 정연히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수밖에, 겨울산행이란 땀을 아끼되 쉬지 않고 꾸준히 오르는 것이 아니던가.

오르는 만큼 기온이 낮아지며, 칼바람이 몸 속을 파고들 때마다 체감온도가 뚝뚝 떨어져 풀썩풀썩 주저앉고 싶어지니, 자주 쉬거나 오래 멈춰설 수 없다. 무리하게 이동해서 축축하게 젖은 몸으로 냉기의 빨판을 영접할 수도 없다.

체온이 순식간에 급락하면 더욱 극렬해지는 추위에 대한 대항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니까.

속도 조절 뿐인가. 체중을 가볍게 해야 한다. 가파른 언 땅을 걸어 올라가기 위해서는 전신의 무게를 두 다리에 모두 실을 수 없다.

스틱으로 상체의 무게를 완충하고, 매 순간 온 몸 뼈 마디마디의 빈 공간으로 힘을 분산시켜야 한다. 그런 유연한 집중은 동물적인 본능에서 비롯한다. 학습되지 않은 돌발 상황 조차도 일사분란하게 대처하는 관절과 근육들의 협력이 그 증거다.

겨울산에 안기는 나는 이렇듯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 물아일체의 희열에 빠진다. 겨울산행이 그렇다. 살펴 보면 모든 것이 고행인데, 본능을 깨우는 위험을 기꺼이 상면하며 성취감 하나로 스스로 대견해진다. 또 어떤 경우가 이토록 살아있다는 그 자체로 짜릿할 수 있겠는가.

한계를 극복하려는 도전의지는 거기에서 샘솟는 것이다. 산술적으론 감당하지 못하는 다각적이고도 복합적인 복병들에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자기를 뛰어넘어 탈속에 일체화 될 때의 환희와 그런 경험을 통해 깨어난 잠재력이다.

정신의 근육이란 긴장의 한계를 극복할 때마다 자라는 것이니까. 몰입이란 그 순간이나 그 대상 밖의 것을 지우는 것이어서, 회를 거듭할수록 몰입은 뚜렷해지고 그 확 트인 주변은 확장되어 가는 법이다. 매번 산행을 꿈꾸게 하는, 벅차오르는 기쁨의 크기는 거기에 비례한다.

몰아일체의 도취는 일상에서 쌓은 경지

그렇다. 외부에 대한 응변의 성패는 심신의 근력이 얼마나 강하고 유연한지가 결정한다. 서두르지 말아야 할 험로를 만났을 때, 험로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한다는 건 바람을 가득 채운 풍선을 최대한 터지지 않는 지점까지 누르고 있는 것과 같다.

조급증을 완전히 통제하고 위험을 느긋하게 대면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겨울산행에 나서서 생사의 기로에 뛰어드는 건 무모하다. 그렇게 정신의 근육을 키우는 행위는 사선(死線)의 유희와 다르지 않기에.

몰입은 일상에서 훈련되는 것이다. 그 기회는, 평탄한 길에서 안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험로를 택했을 때 얻어진다. 일상의 험로란, 기득권의 가치에서 밀려난 길이다. 협소하여 빨리 오를수 없고, 가도가도 벼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길이다.

그러나 그 인고의 길 위에는 만다라화가 피고, 속죄와 성찰의 서(書)가 존재한다. 좁아터진 벼랑길 위에서는 서로 추월하지 않으며, 추동하고 배려한다. 갈 길은 막막하고 무수한 장애를 만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뒤따르는 누군가를 위해 한 발이라도 더 나아가려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실족하는 찰나의 순간에,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순간에, 누군가 옆에 있어야 한다. 그 누군가는 자기의 호흡을 버리고 기꺼이 자기를 던져 불균형의 지지대가 되어 줄 것이므로. 이렇게 겨울산행은 일상에 기반한다.

해탈은 누군가의 조력에 힘입고, 그 누군가는 고락(苦樂)의 길을 함께 걷는 이다.

그 길 위에서는 운명에 순응하되, 하늘이 부여한 운명인지 인간이 조작한 운명인지를 끊임없이 가리는 누군가들이 생사를 거듭한다.

치열한 고민과 저항으로 천부(天賦)의 길을 찾아내고 복원하며, 그 길로 누군가를 안내하는 누군가의 피가 꽃이 되고, 그 향기에 혼절하듯 길 위에서 몰입의 극치에 이르는 누군가들의 도시. 우리들의 일상은 그런 꿈을 꾼다.

나는 내 곁의 험난한 일상을 보내는 누군가와 함께 기꺼이 겨울산행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