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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호 밑도 끝도 없이 한없이 쓸쓸한

편집국장 공인배

그런데 모호성과 불확실성은 우리의 외부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선택의 결과를 책임져야 할 우리는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우리 앞에는 무수한 불행과 고통, 재앙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들은 어떤 시간들의 결 뒤에 숨어있다가 불쑥 나타나지만, 그러기 전까지 우리의 오감은 그 어떤 조짐 조차도 감지하지 못한다. 인간에게는 매 시간이 들이미는 수 없는 선택의 시간에 그 결정 뒤의 결과를 간파할 지혜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은 정해져 있다는 확신과 자주 조우하곤 한다. 또한 아무리 노력하며 몸부림쳐도 루저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열패감은 결정론을 지탱하는 초석이 된다. 그렇듯 불확실성에 휩싸인 인간은 영락없이 무기력의 나락에 떨어진다.

운명이란 사실 모호한 것의 대명사다. 어떤 시간이 공간의 관계들 사이에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상황, 그것의 결과는 공식으로 정리될 수 있을 테지만, 선택을 요구하는 매 순간의 상황은 우리에게 언제나 처음이다. 그 상황이 품고 있는 위험과 기회를 그 순간엔 절대로 미리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모호성과 불확실성은 우리의 외부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선택의 결과를 책임져야 할 우리는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에 앞서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잘 모른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정체성이란, 자신이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정체성과 크게 동떨어졌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그렇지 않은 순간들보다 훨씬 많이 발생한다.

인간은 구조적으로 자기 내부를 믿지 못한다. 자기 욕망은 외부의 환경에 수용되기 어렵다고 믿으며, 자기 내부를 닫고 외부에 동화되는 것이 안전하다고 확신한다. 자기 정체성이 시간이 흐를수록 객관화되는 기제다.

이 같은 내부의 모호성은 운명과 닮았다. 위험하며 예측을 불허한다. 불안을 제거하고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객관화 되어버린 우리가, 역설적이게도 미지의 운명과 교섭하는 비정상은 그 동질감에서 기인한다. 합리적인 판단과 선택이 전혀 원치 않는 양태로 끔찍한 결과를 낳아도 우리는 운명의 장난에 재빠르게 순종할 수 있다.

그렇게 삶이 자의에 반해 전개된다면 혹은 외부환경에 최적화된 다른 내가 매 순간의 선택을 결정한다면, 우리의 삶이란 근원적으로 무의미하다. 시간과 운명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투쟁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한없이 쓸쓸한 존재다.

설령 우리가 운명에 지배되는 존재라 하더라도, 결코 자주적인 판단과 선택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눈 앞의 불공정을 제거하는 것이다. 독점구조를 타파하고 계층 간 이동로를 확장하는 일이다.

현실 속에서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은 자기 억압을 완화해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부의 문을 열고 외부와 통섭할 수 있다면 나만의 '나'를 기를 수 있다. 다른 이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줄 수 있는 '나'의 역량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 생장환경을 이 세상에 조성할 수 있는 힘은 정치에 있다. 정치인은 살피는 자이고 계획하는 자이며 변화시키는 자다. 그것을 위해 자기 고유의 가치를 축적해 나가며, 자신의 내부와 외부의 교집합을 끊임없이 늘려나가는 자다.

그런 정치인의 희생으로 우리는 결국 운명 앞에 경직되지 않을 정도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독과점과 빈익빈 게이지가 임계점을 넘은 지금 우리에겐 우리의 어깨에서 무거운 짐을 덜어 대신 짊어지고 내일을 향해 뚜벅뚜벅 함께 걸어갈 정치인이 필요하다.

실업인구가 100만 명에 육박하는 데다 청년실업 인구가 그 가운데 40%를 상회하는 시대다. 지난 21일 현재 가계 부채가 1,344조 원에 달하고, 한계에 도달한 하우스푸어가 182만 명에 도달했다. 문제는 이런 위기 수치들이 갈수록 높아간다는 것이다.

운명에 지배되는 부자유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란 결국 우리가 운명 앞에 당당해지고 자유로워지는 것인데, 정치인들은 어디에 시선을 두고 있을까. 또, 그 시선은 어떻게 길러진 것일까. 대통령 탄핵정국 속에서 대선후보들이 여기저기서 자기주장을 펼치고, 상대방의 발언이나 주장을 비판하거나 그 주장에 의견을 덧대고 확장하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이 어수선함 속에서 '그들은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 오늘 우리의 불완전성을 들여다보는 동기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 민주당 경선 예비후보들의 화법을 분석한 전문가들의 평가가 눈길을 끈다.

문재인 전 대표의 화법은 모호한 것으로 평가됐다. 그는 화학적으로 소화한 말을 한다기보다 병렬적으로 입장을 나열하는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종종 구설에 올랐고, 지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불렀다.

안희정 충남지사의 화법은 추상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총론은 있지만 각론이 없고, 대단한 철학의 언어처럼 보이만 상황을 왜곡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로인해 그는 광장의 격정적인 민심과 괴리되는 모습을 보였고, 자신이 일으킨 물의를 사과하기도 했다.

이재명 성남시장의 언어는 불안한 것으로 평가됐다. 치열한 삶을 살아선지 언어가 척박하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어려움 없이 성장한 필부들에겐 낯설어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비판을 불렀다.

3색 화법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들만을 적출해 봤다. 이 가운데 우리가 차선을 선택해야 한다면, 이재명의 치열하기 때문에 불안한 언어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 한다. 모호하거나 추상적인 등속의 언어란 운명에 굴복하는 결정론에 가깝기 때문이다.

불안은 적어도 불안을 자각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척박하다는 것은 원시적이라는 것이며 그것은 빠르고 쉽게 전달된다. 위기의 시대. 투사는 불안하지만, 불안을 다룰 줄 아는 투사가 우리의 불안을 통제할 수 있는 법이다.

삶의 질을 높이는 것, 혹은 행복해지는 것이란 결국 운명 앞에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문재인과 안희정에게 불확실한 현장에 대한 비전 설정이 절실한 이유다. 미래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을지라도, 이유가 명료한 선택들을 보여주고 확고한 실천의지를 보여야 하는 까닭이다.

우리의 운명이란 매 순간 운명을 맞이하며 끊임없이 고민하며, 그 고민을 희망으로 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