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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호 어물쩍을 경계한다

편집국장 공인배

전문성을 경쟁력으로 내세웠다면, 이제 한 번 실력을 보여줄 때가 되지 않았는가. 청산과 재발방지는 행정전문가가 들고 있는 준엄한 칼의 의미가 아닌가.

정헌율 호가 출범한 지 오는 14일로 꼭 1년이 된다. 2년짜리 보궐선거에서 선출됐으니 반환점을 막 도는 셈이다. 중간평가를 하기에는 지켜본 기간이 충분하지 않다. 남은 기간도 그만큼인데, 선거까지 겹쳐 있으니 제8대 정헌율 익산시장의 집무 연한은 사실상 반년 남짓이 남아 있는 셈이다.

중장기 정책을 세우고 그걸 실현할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정도의 시간이 지났으며, 그 이상 큰 진전을 보이기 어려운 임기가 남아 있다. 하지만 정헌율 시장은 제7대 시장의 잔여 임기를 이어받은 입장에서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기 보다는 당면한 현안을 수습해야 할 책무가 더 컸다.

눈을 크게 뜨지 않아도 보인다. 모현 우남아파트 긴급대피명령을 비롯해 익산시하수슬러지 처리시설 공사 중지명령, 상수도체계 개선 등은 지역사회를 큰 혼란에 빠뜨린 현안들이다.

모현 우남아파트 긴급대피명령은 그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행됐다. 긴급하게 대피해야 할 급박성이 없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42.7%의 주민들은 익산시의 긴급대피명령에 불응하고 모현 우남아파트에 남아 살고 있다. 익산시의 단계적 조치에 따른 불이익을 모두 감수했다.

사후조치도 적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최소한의 이주비를 받고 나왔던 주민들은 대책없는 피난살이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보수보강의 길이 막혔고, 사업성이 없어 재개발도 불투명하다. 그렇다고 형평의 원칙을 지켜야 할 익산시가 민간공동주택 재개발 사업비 일부를 보조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애당초 가당찮은 긴급대피명령이었다. 그러나 불가하다고 의견을 개진한 공무원은 좌천되고, 부적절한 지시에 따른 공무원은 승승장구했다. 정헌율 시장은 무엇을 해야 했는가.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는 일이다. 모현 우남아파트의 시공사인 우남아파트건설로 하여금 어떻게든 보수보강을 하도록 해 대피했던 주민들을 입주시키는 일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최대한 빨리 일을 성사시켜야 한다. 모현우남아파트 가격은 갈수록 하락하고 있다. 주민들을 강제로 퇴거시킨 익산시의 책임이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는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오기 전에 해결에 나서야 한다. 이와 함께 부적절한 공무원들이 누린 수혜를 박탈할 수는 없을지라도, 불이익을 받은 공무원들의 지위는 어떤 방식으로든 복구해야 한다.

그것은 공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정헌율 시장이 부당한 지시에 저항하는 공무원을 존중하겠다는 표방이며, 공직기강을 다잡는 상징적인 수단이다.

익산시하수슬러지 처리시설 공사 중지명령 역시 자의적 판단에서 기인했다. 공법은 공사발주 전에 결정됐는데, 그 과정에서 수 차례 주민들의 여론이 수렴됐다. 공사가 20%나 진행됐는데, 주민들이 공법 변경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익산시에 서면으로 민원을 접수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덜컥 공사를 중지시켰다.

담당부서 공무원들이 반대하다가 좌천됐고, 새로 전보된 공무원들은 시장이 시키는대로 했다. 공사를 중지시킨 상태에서 공법변경 문제를 검토한다던 익산시는 검토결과를 공표하지도 않고, 공사를 재개시키지 않은 상태로 시간을 보내다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일방적으로 공사계약을 해지했다.

공사를 중지시킨지 4개월만이었다. 이로인해 익산시는 기 지급된 기성금 36억5천만원과 지급해야 할 손해배상액 26억9천만원 등 63억4천만원 가량의 손실을 봤다. 하수슬러지 처리시설 사업비로 지원받은 국비 120억4700만원은 반납했으니 짓다 만 건물은 무용지물이 됐다.

국가보조금법을 위반하면서 익산시 재정을 축낸 관련자들에게 구상권을 행사해야 할 익산시는 공사해지일로부터 2년 3개월 동안 직무를 유기했다. 바통을 이어받은 정헌율 시장의 임기 개시일로부터는 1년이 지났으나 책임의 경중를 따진 배상 기준율 조차 산출하지 않고 있다.

공무원의 위법 부당한 행위로 재정이 손실되어도 아무런 재제를 하지 않겠다는 묵시적 천명이 아닐 수 없다. 긴급대피명령과 공사중지명령은 데칼코마니적 성격이 짙다. 부당한 지시에 항명하다 불이익을 받은 공무원에게 잃어버린 점수를 부여해야 마땅하다.

상수도 체계개선은 익산시가 나서서 기존에 먹던 수돗물을 믿지 못할 물로 매도하면서, 비싸지만 믿고 먹을 원수를 공급받아야 한다고 시민들을 겁박한 사건이다. 하지만 시민들의 반대로 그 시도는 무산됐다. 문제만 남았다. 하나는 상수도 행정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이고, 또 하나는 먹는 물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이다.

고위직 공무원들까지 나서서 끓이지 않은 수돗물을 먹는 행사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그 안전성을 홍보해왔던 익산시가, 상수도 체계개선이 필요하다는 당위를 내세우는 순간부터는 익산시의 상수원 수로가 개방형이어서 위험하다며 자기를 부정했다.

정헌율 시장이 무엇이 진실인지 뚜렷하게 밝혔어야 하는 이유다. 지금 먹는 물이 안전하다면 왜 그러한지, 안전하지 않다면 무엇 때문인지를 소상하게 설명해야 한다. 또, 한때 나마 익산시 수장의 목적 프레임에 갇힌 공무원들이 안전한 물을 가리키며 "안전하지 않다"고 시민들을 기만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관련자들을 처벌해야 마땅하다.

먹는 물은 생명과 직결되지 않는가. 30만 시민이 익산시 수돗물 때문에 불안에 떨고, 그 안전시스템을 의심하고 있다. 매년 수백억(2017년 325억)씩 퍼들여 원수를 구매하고 정화·공급하는 모든 공공체계가 뻘짓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름 아닌 익산시 상수도 사업소가 폭로했다.

2014년 10월을 기점으로 이전에는 완벽하게 먹어도 좋은 수돗물이 그 이후에는 어떠한 조건의 변화도 없었는데 먹으면 위험한 물이 되었다. 그렇다면 무용한 시설과 조직을 계속 존치시키면서 수도요금을 계속 인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익산시의 상수도 행정이 이토록 불투명한 적이 없었다. 할복을 하든지 진정한 공복이 되든지 둘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공복이 되겠다면 혼란에 빠진 주인을 겉돌면서 모르쇠 작전으로 농락하면 되겠는가.

상수도 체계개선을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시민들의 뜻대로 하겠다는 게 정헌율 시장의 뜻이다. 그러나 지금 시민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하는가. 무지한 상태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 만큼 위험한 일이 또 있는가. 익산시가 먹는 물과 관련하여 시민들에게 명확하고도 객관적인 지표를 제공해야 하는 이유다.

정헌율 시장이 전임 무자격자에게 물려받은 과제는 '행정 업무의 연속성 유지'다. '내가 한 일도 아닌데'라는 무사안일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잘못을 저질러도 징계시효만 벗어나면 된다는, 공직사회에 만연한 무책임 행태를 일소하는 일이다.

어물쩍 뭉개며 시민들의 뇌리에서 현안문제들이 지워지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인화성 높은 사안들이란 방화보다 자연발화일 때 더 연소력이 높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한꺼번에 발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민들의 불신이 쌓이면 행정이 설 자리가 어디에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