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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호 좌파 정파의 퇴색을 우려한다

편집국장 공인배

하지만 오늘의 좌파가 원형을 잘 지키고 있느냐는 질문 앞에서는 망연해지고 만다. 이 사회의 변혁을 이끈 주체이면서도 좌고우면하는 덫에 이 땅의 좌파가 사로잡혀 있지 않다 말할 수 없다. 세불리기에 골몰하면서 틈만나면 '중도'에 뭘 갖다 붙이는 시도가 어디 한두 번인가.

이는 정체성이 묽어져가는 것을 방증하는 태도다. 지쳤다는 표징이며, '생존을 위해 자기중심의 사고를 버려야 한다'는 변화의 당위를 자기합리화의 수단으로 삼는 비겁한 행태다. 그것은 좌파가 우리 사회 변혁의 근저에 있으면서도 현실적인 애해관계 등에 의한 이합집산의 산물이라는 시각에 논박하지 못하는 지점들이다.

요즘 시중에 나가면 진보 좌파 정당이 문재인 정부의 개혁드라이브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익산이 민주당 텃밭이기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실제로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보편적 복지'와 노동시장 환경개선 로드맵은 전대 정권을 통틀어 가장 독보적인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좌파 정당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든지, 해산하고 민주당과 합쳐야 한다든지 하는 생각은 위험하다. 존재감이 '약화되면 퇴장'이라는 도식은 편견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좌파 정당을 향해 더 진일보한 생각을 하고 더 효과적인 활동을 해서 존재감을 부각시키라고 말해야 옳다.

'한쪽을 모조리 부정'하는 것은 모든 적폐의 시작이다. 우리는 이전의 몇몇 정권들에서 그것을 체감해 온 터다. 사찰이다 블랙리스트다 믿기지 않는 사실들을 낳는 돌연변이 권력이 자라난 토양이며, 승자독식주의를 만연케 한 기제다.

이 나라 사람들이 농단하고 갑질하기 위해서 모든 경쟁에 뛰어드는 것으로 곡해하는 그 기저에는 바로 '상대방에 대한 부정'이 있다. 그런 풍토 속에서는, 국회의원을 많이 확보한 쪽 또는 대통령감의 구심력으로 지탱되는 정당이 우위에 있고 유의미한 것으로 규정된다. 정당 내의 대통령감이 경쟁력을 상실하면 정당의 경쟁력도 동시에 사그라든다고 생각하는 배경이다.

정당이란 본디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결사체인데, 수권정당이거나 그에 버금가는 정당이 아닌 정당의 경우 정강정책마저 군소 의견으로 취급받는 것이다. 그런 지형이나 사고방식들은 다양성과 다원성이 강조되는 시대를 거스른다.

그렇다면 꿈이 있었기에 개혁을 추구하는 현재 권력은 단박에 이상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가. 지난한 일이다. 상대를 철저히 배제하는 적폐세력이 그걸 그냥 놔둘 리 없고, '안정'이란 지표를 소홀히 할 수 없는 현재 권력의 속성상 개혁에만 올인하며 비타협적 정치에 경도될 수는 없다.

절반의 성공을 예상하는 것도 후하게 쳐주는 것이다. 상대의 전면적인 저항과 불안을 저감해야 할 책무에 대한 중압감, 그것을 거스르는 견인(개혁)에 피로까지 겹치면 권력이란 현실과 타협할 적정한 지점을 찾게 마련이다.

추진하는 정책 상당부분을 소위 우파가 동의하는 균형형 제도로 타협하고 안주할 공산이 높은 것이다. 따라서 좌파가 추구하는 이타형 제도의 필요성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좌파는 현재 권력의 균형추가 약탈적 경쟁질서 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상생과 공존의 무게를 더하는 파수꾼이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들 삶의 질을 높이는 스펙트럼의 폭은 정부나 집권여당 또는 거대야당보다 '현재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꾸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좌파 정당이 더 넓다 할 것이다. 좌파란 이해관계에 얽매인 정치와 고정관념에 끊임없이 부딪혀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그것은 기득권에 대항하기 위해 존재하면서 애당초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는 무결주의와 일맥상통한다. 그런 맥락의 사고체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그 '불가능'이 부조리한 주체들의 수식이며 그들이 친 장벽이라는 사실을 직시한다.

좌파가 개혁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있는 일이며,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는 방향성이 되는 것이다. 좌파의 그런 신념의 근저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을 좇은 데서 발원한다.

그래서 좌파란 차갑고 친화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세를 불리기 어려운 이유다. 특히 눈앞 현실에서 이성의 영향력은 미미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뒤돌아 볼 여유가 생겼을 때 역사는 결국 좌파가 제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것을 동의할 수밖에 없게 된다.

더디거나 정체기를 거치거나 전면 부정되는 암흑기가 있었을지언정 역사는 좌파가 설치한 본궤도를 찾아가는 관성을 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현실 속에 치열하게 동화되어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도 좌파와 같은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함께 꾸는 꿈

사람들의 꿈과 희망이 세상을 바꾼다. 좌파는 그 거울이다. 좌파가 어떤 꿈과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에 이 사회와 나라의 미래가 달려 있다. 올해는 광장민주주의가 세상을 바꿨다. 정통성 없는 대통령을 탄핵하고 국정을 농단한 적폐세력을 몰아냈다.

워낙 강고한 낡은 진영과 그들을 옹위해 온 고정관념과 정서의 벽을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거룩한 마음의 물결은 여전히 일렁이고 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새로운 꿈과 욕망을 갖도록 환경을 조성해 온 것은 바로 잠들지 않고 깨어 있었던 좌파다.

그들이 꿈과 욕망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기나긴 대장정을 하지 않았었다면, 그들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을 어둠 속에서 갈고 닦지 않았다면, 그들이 망망한 적폐의 바다 위에서 사경을 헤매면서도 'no'를 외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일상에 쫓기는 대중에 불과했을 공산이 높다.

우리가 이룩한 민주주의는 그런 의미에서 정치의 장(場)을 바꿀 것이다. 권력과 쟁취에 경도되지 않고 조화와 타협을 구가하는 장이 될 것이다. 정치는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증진시키는 도구가 될 것이다.

고정되고 편향된 시각을 버리라는 요구는 있을지언정, 협동사회의 기치를 높이 들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으며 백절불굴의 의지로 뜻을 관철시켜 나가는 정체성을 버리라고 사회가 요구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작금의 좌파는 궁핍과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타협하는 새로운 길의 모색에 골몰하고 있지 않은가 한다.

그런 모호한 태도 때문에 정체불명의 '중도'는 있되 '좌'는 없다는 말이 나오고, 우파와 다름없는 좌파라는 부정적인 꼬리표를 달게 되었다. 오직 자기 이익을 위해 서로 충돌하며 대중들을 극심한 혼돈에 빠뜨리고 사회적인 피로도를 높이는 족속들로 오해를 받기에 이르렀다.

좌파다운 좌파가 우파다운 우파를 창출해

우리의 좌파는 16세기에 가장 선명한 정체성을 거양했다. 경상좌도의 퇴계 이황과 경상우도의 남명 조식이 그 영수들이다. 그들은 본래 영남학파의 동인 정파였으나, 관료의 길을 걸으며 훈구파에 속하게 된 퇴계와 국가의 부름을 거부하고 재야 지식인의 길을 선택한 남명은 각각 남인과 북인의 거봉으로 분립되었다.

한 세기에 걸쳐 정치적·경제적 기득권을 향유하면서 귀족화한 훈구파와 사회 개혁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 사림파의 격돌은 연속적으로 발생했고, 그때마다 사림은 피바람의 광풍에 휘말리는 사화(士禍)를 겪어야 했던 시기였다.

예외없이 칼자루는 언제나 정치적·경제적으로 우위였던 훈구파가 쥐고 있었기에, 훈구파의 적폐를 청산하려던 왕조차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왕이 추구하는 미래가 사림에 있다 하더라도 왕은 자신의 오늘이 있게 한 훈구파를 외면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림은 끝내 꺾이지 않았다. 스스로가 미래라는 확신을 가지고 향촌에서 때를 기다리고, 후학을 길렀다. 관료들이 전횡을 휘두르고 왕이 그릇된 정사를 펼칠 때 목숨을 건 직간을 마다하지 않았다. 퇴계 같은 이들은 훈구파 안에서도 그 사림의 정신을 버리지 않았기에 조정과 사림이 화쟁의 정치를 실현하는 것을 매개할 수 있었다.

그들은 좌파다운 좌파가 우파다운 우파 혹은 말이 통하는 우파를 창출한다는 것을 실증했다. 좌파가 뚜렷한 미래일 때 우파를 변화시킬 수 있다. 상호 이해관계를 조정해 상호 조화를 이루는 것은 자기다운 주체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우파와 같은 시각을 가진 좌파가 우파를 이해한다는 것이나, 그런 견지에서 대화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미래의 설계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런 제자리걸음의 정치적 평화가 정치의 선진화라며 안주하는 좌파가 우리에게 더 이상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갈팡질팡하며 머뭇거리는 좌파가 안타까운 한 해였다. 개혁 주체이면서 여러 오해를 불러 감당해야 할 또 다른 장애들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 우리 사회의 당면 과제인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려고 할 때 가진자들의 실질적인 동의가 관건이다.

개혁 주체가 공평무사하고 개혁을 합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갖추어야 하는데, 현실에 안주하는 좌파가 그걸 해낼 수 있을까. 바른 이름값을 위해 긴 시련을 견디고 장렬히 전사하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각오 없이 좌파가 좌파다워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