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곡

(인문운동가)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우리 정치에 보내는 공자의 메시지를 적어볼까 한다.)
「자로가 묻고 공자가 답한다.
“위나라 임금께서 선생님께 정치를 맡기신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시겠습니까?”
“반드시 이름을 바르게 할 것(正名)이다.”
“현실과는 먼 말씀이 아니신지요. 어찌 정명(正名)을 먼저 이야기 하십니까?”
“자로야, 너는 참 비속하구나.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일에는 입을 다무는 법이다. 명(名)이 바로 서지 않으면 말이 꼬이고(名不正則言不順), 말이 꼬이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며(言不順則事不成),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고(事不成則禮樂不興), 예악이 일어나지 못하면 형벌이 적절하게 집행되지 못하고(禮樂不興 則刑罰不中), 형벌이 잘 집행되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 둘 곳이 없게 된다(刑罰不中 則民無所措手足). 따라서 군자가 명을 바로 세우면 반드시 말이 서고, 말이 서면 반드시 행해지게 될 것이니, 군자는 말을 세움에 있어 조금도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故君子名之 必可言也 言之必可行也 君子於其言 無所苟而已矣)” (제13편 자로)」
 

정명(正名)을 말할 때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그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라는 공자가 제경공의 정치에 대한 질문에 답한 문장을 들어올려, 봉건군주제와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보수반동적인 시각으로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것은 그 시대의 제도와 관념이 갖는 한계일 뿐, 본령은 각자 또는 각 집단이 각각의 정체성을 바르게 하여 그 역할들을 조화롭게 수행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ㅇㅇ다움’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분수를 알고 분수에 맞게 살라’고 하는 말이 일종의 저주로 들리는 것은 신분제 사회나 차별과 불평등 불공정이 지배하는 부정의(不正義)한 사회에서 피지배 신분이나 계급 또는 이른바 흙수저로 태어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투쟁이나 노력을 포기하라는 말로 들리거나 그렇게 써먹을 때이다.

신분제 사회나 부정의한 사회에서 그 억압이나 불평등과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우는 것은 당연하고 정당하다.
왜냐하면 그런 사회는 ‘분수’에 맞게 살 수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두 같으면서도 모두 다르다.
성격, 적성, 취향, 소질, 체질, 소망, 역할 등이 같은 사람이 없다.
이 다름이 분수이며 그 분수에 조화되는 상태를 ‘ㅇㅇ 다움’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다름 때문에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인류가 지향하는 보편적 이상(理想)이고, 이 이상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가장 자기답게 사는 행복과 자유를 방해하는 사회적 조건들을 개선하기 위하여 싸워 왔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 것이다.
목수나 농부의 삶이나 판사나 의사의 삶을 사는 것 등이 다 자기의 적성과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한 것일 뿐 아무런 차별이나 우열(優劣)이 없는 사회, 남자로 태어났거나 여자로 태어났거나 어떤 차별도 없이 그 다움을 가장 조화롭게  발휘하는 세상을 위해 투쟁도 하고 협력도 하는 것이다.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적 혼돈은 그 정체성의 혼란이 큰 원인으로 보인다.
한국 정치에서 보수와 진보, 좌와 우의 시대에 맞는 정명(正名)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정치적인 견해의 다름이나 이해관계의 상충으로 진영이 나누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때로는 대립 투쟁도 하고 때로는 사회적대타협을 할 수도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사회가 진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과 유리된 관념이나 이미 용도 폐기된 이데올로기 특히 과거 집착적인 정서 등으로 편을 갈라 심리적 내전에 가까운 상태에 휘말리는 것은 그야말로 시대 착오적인 혼돈이며, 이런 상태에서는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나는 ‘정명’을 현대적 용어로 표현한다면 ‘시대정신의 구현을 위한 종합 철학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보고 있다. 풀어야 할 난제가 많을수록 또 그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법이 서로 모순되어 보일수록 먼저 ‘종합철학’을 바로 세워야 한다.
과거의 진보니 보수니 좌니 우니 하는 고정되고 편향된 시각으로는 지금의 시대적 요구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과거의 관점에서 보면 모순 되게 보이는 요소들이 이제 상호보완하고 인간 진화를 위한 길에서 함께 나가야 할 동반자라는 관점이 우리가 세우고자 하는 종합철학이 아닐까 한다. 민주화와 물질적 생산력의 향상 등은 과거에 비해 이러한 종합철학이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시켜 왔다. 다만 사람들의 의식과 정서가 이에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과거의 좌우, 보수와 진보, 자본계와 노동계 등의 고정관념들이 정치발전에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중국의 마오쩌뚱(毛澤東)은 이른바 대장정이라는 고난의 행군을 통해서 국민당 군대를 타이완으로 추방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최고사령관이었다. 하루에 한 번씩 전투를 하고, 평균 37킬로미터를 걸어 368일간 총 1만 2천 킬로미터를 걸어야 했던 그 엄혹한 시기에 마오쩌뚱은 당과 군의 간부들에게 철학을 공부할 것을 제의하였고, 많은 간부들이 회의적이거나 반대했을 때, 마오(毛)는 ‘이런 시기야말로 철학을 공부할 때’라며 그의 제안을 관철시켰다.
마오는 공자를 비판했지만, 정명(正名)의 중요성을 알았던 점에서는 공자의 제자였다.
그러나 권력투쟁으로 진행된 문화대혁명은 마오(毛)의 결정적 오류였고, 중국은 위기에 처했다.
이 위기를 벗어나 이른바 중국의 굴기(屈起)를 가능케 한 것은 덩샤오핑(鄧小平) 등의 실사구시의 실용주의에 바탕한 새로운 정명(正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식민지에서 갓 벗어나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을 겪고서도 반세기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달성한 세계에 그 유례가 없는 위대한 나라다.
중국을 여러 부문에서 앞섬으로써 사대모화(事大慕華)의 오랜 폐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었고, 일본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에도 주눅들지 않을만한 실력을 갖추었다.
이제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 앞에서,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종합 철학과 우리 공동체의 건국정신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을 홍익만유(弘益萬有)로 승화시켜 인류사적인 ‘대장정’에 나설 수 있는 나라가 된 것이다.
그것을 정치가 앞장서야 하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는 현실을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한다.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다원적인 여러 정치 주체들이 각각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정체성’(正名)을 제대로 세워 그것을 바탕으로 연합정치를 성공시키고, 나아가 새로운 문명을 개척하고 선도하는 21세기 선진국으로 대한민국이 우뚝 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