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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호 썩은 그물에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

편집국장 공인배

헌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 기관의 정상적인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고 오작동케 한 김기춘과, 거기에 꼭두각시 노릇을 한 헌재의 행위는 국헌문란이다.

비망록이 사실이라면, 권력이 헌법을 유린하고 그 질서를 파괴했다. 정당제를 채택하고 있는 체제를 무너뜨렸다. '공정'과 '평등'이라는 민주주의가치를 지우고 그 위에 오직 '지배'와 피지배'의 훈령을 썼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건국 사상 초유의 정당 해산에 간여했음을 보여주는 비망록이 출현했다. 김 실장과 함께 근무했던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업무수첩이다. 비망록에 따르면 김기춘은 2014년 통합진보당(이하 통진당) 해산심판청구 사건을 재판중이던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논의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김 실장은 헌재의 통진당 사건 선고 이틀 전에 정당 해산을 결정한 재판 결과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언급했다. 또 당시 통진당 소속 국회의원들의 의원직 상실 여부를 두고 헌재 재판관들 간에 이견이 있다는 사실 등 평의 내용도 상세하게 언급했다.

헌재는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이 헌법에 부합하는지를 심판하고, 행정부의 공권력 행사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지를 판단하는 헌법 재판 기관이다. 국가권력에 의해 침해된 국민의 기본권을 구제하는 최후의 보루다.

그런 최상위 기관인 헌법재판소가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하고, 삼권분립 원칙을 내팽개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정국이다. 엄중한 시국이다. 탄핵을 심판할 헌재가 탄핵 대상의 도구 노릇을 해 온 정황이다.

헌재가 정권의 기획과 지휘 아래 특정 사건을 재판하고, 그 과정을 공유하며 정권이 필요로 하는 결론을 만들어 바쳤다면,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킨 행위다. 헌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 기관의 정상적인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고 오작동케 한 김기춘과, 거기에 꼭두각시 노릇을 한 헌재의 행위는 국헌문란이다.

그렇다면 통진당은 무슨 죄를 지어 헌재의 결정에 의해 해산되었는가. 바로 내란음모죄다. 국헌을 문란케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킬 음모를 꾸민 죄(형법 제87조)인 것이다.

그런데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 곳곳은 김기춘 실장이 통진당 사건에 얼마나 집요하게 간여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014년 8월 25일자 페이지에는 "통진당 사건 관련 지원방안 마련 시행, 재판진행상황 법무부 TF와 협력"이라는 지시가 기재되어 있다.

이 때는 법무부가 '이른바 이석기 전 의원이 지하혁명조직 RO의 수괴이고 이 RO가 통합진보당을 장악하여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내란음모를 하였다'며 헌재에 통진당 해산청구를 해놓은 상태였고, 내란음모사건을 맡은 서울고등법원이 "지하혁명조직 RO는 존재하지 않고 내란음모는 없었다"며 내란음모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지 14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헌재가 통진당 해산청구를 각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 실장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통진당을 해산시키기 위해 청와대가 전방위적으로 지원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법무부는 여기에 부응했다. 'RO가 통합진보당을 장악했다'가 정당 해산청구의 골자였는데, 갑자기 '민혁당 잔존세력이 통합진보당을 장악했다'로 변경하고, 새로운 증인들을 신청했다. 재판이 완전히 새롭게 시작된 것인데, 이 같은 범죄사실 심리와 법리판단은 일선 법원이 하는 일이다.

따라서 헌재는 청구주체가 핵심 주장을 바꾸는 것과 새로운 증인을 채택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는 입장이다. 특히, 사법부의 판단을 놓고 청구를 각하할지 인용할지를 판결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며 논란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헌재가 몰랐을 리 없다.

말하자면 법원이 통진당의 내란음모죄를 인정하고 형을 확정했을 경우, 헌재는 그 인정된 사실을 바탕으로 그러한 범죄행위가 정당해산 사유에 이르렀는지를 심판하면 되는 지위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헌재는 법원이 죄가 없다고 판단한 사건을 마땅히 각하하지 않고, 통째로 다시 시작하는 형사재판을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은 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이 순간 헌재는 형사재판소로 전락했다.

무엇보다 비망록 대로 통진당 해산결정 선고 시점을 김 실장이 미리 알고 있었다면, 그것은 헌재가 김 실장의 지휘를 받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왜냐하면 통진당해산심판 사건은 통진당이 내란을 음모한 집단인가를 먼저 심리해야 하는 형사재판 수순을 밟거나 대법원의 판결을 지켜봐야 하고, 사건 기록만 13만페이지에 달했기 때문이다.

김 전 실장이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통진당 해산심판사건이 연내에 선고된다고 말한 2014년 10월 4일에는 재판 당사자들 가운데 누구도 선고 시점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부와 통진당이 제출한 서증 조사 조차 마치지 못한 상태였고, 핵심증인들에 대한 신문도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당해산 사건의 핵심 지표가 되는 '통진당 내란음모사건'의 대법원 판결이 2015년 1월 22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헌재 스스로 통진당의 형사책임을 가리기 조차 물리적으로 난망한 상태였다.

그러나 헌재는 2014년 11월 25일 변론을 종결하고, 같은 해 12월 19일 통진당 해산 판결을 선고했다. 박한철 소장과 김실장 사이의 약속이 지켜진 것이라는 인식이 오류일까? 아니다. 비망록에는 김실장이 헌재의 선고 이틀 전인 2014년 12월 17일 청와대 비서관 회의에서 헌재가 통진당 해산을 확정했다고 발언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비망록에는 또, 당시 헌재 결정 못지않게 법조계와 세간에서 논란이 됐던 통진당 지역구 의원들 의원직 박탈 문제에 대해, 헌재 재판관들간에 이견이 있고 박한철 소장이 의견을 조율중이라는 김 실장의 발언도 있다.

후안무치한 권력의 시녀들을 솎아내라

이렇게 청와대와 헌법재판소간에 소통이 잘 되는 나라다. 헌정사상 최초의 정당해산 판결인데, 판결문은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기초적인 사실도 반영하지 않았다. 당초 법무부의 정당해산청구서에 기재된 내용이 곧 판결문이라 할 만했다.

이 날림 판결은 오류 투성일 수밖에 없었고, 헌재는 통진당 측의 거센 판결문 오류 지적에 봉착하여 해산판결 후 20일이 지난 2015년 1월 22일 스스로 해산판결문에 오류가 있음을 인정하고 판결을 고치는 것을 결정했다.

김기춘 전 실장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관계는 또 어떤가. 2014년 11월 26일자 비망록은 김기춘 실장이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선관위 사무총장은 법해석상 통합진보당 소속 지방의원의 자격은 상실되지 않는다고 하니 대책을 수립하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런데 중선위는 헌재의 통진당 해산결정이 난지 3일 후인 2014년 12월 22일, 통진당 소속 비례대표 지방의원 6명에 대하여 "공직선거법 제192조 제4항에 따라 퇴직한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물론 이들 지방의원들은 법원에 지방의회의원 지위확인소송을 제기해 승소하여 현재 지방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안이 이렇게 극명한데, 김기춘은 지난 7일 국회 청문회에서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일지 내용들과 관련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는 "실장이 하나하나 지시했다고 볼 수 없다. 회의에 참여한 각 수석들의 의견이나, 작성한 분의 생각이 혼재돼 있다고 생각한다"고 잡아뗐다.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결정 시기와 결론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완전한 루머"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걸 믿을 국민은 아무도 없다. 비망록과 그와 관련된 사안의 결과가 일치한다. 그래서 비망록은 결정적인 증거능력을 확보한다. 김기춘의 바람대로 당시 청와대 수석들이 제아무리 입을 맞춰 범죄를 가린다 한들, 이렇게 명백한 증거를 탄핵할 수 있겠는가.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제 모든 국민의 눈이 헌재로 쏠렸다. 헌재는 비망록과 헌재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의혹을 불식시켜야 한다.

추호의 정치적 고려도 도려내고 추상같은 평의와 결론으로 대한민국에 희망의 입김을 불어넣어야 한다. 정권과 헌재가 한통속이 되어 국헌을 문란케 했다는 사실을 죽어도 믿고 싶지 않은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