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무차별적인 정보가 쏟아지는 멀티미디어의 시대. 정보들은 만수위의 격랑 속에서 자맥질한다. 더 빛나는 색깔로 더 탐스러운 자태로 더 높은 곳을 향해 뛰어오른다. 오감을 자극하는 모든 정보들의 목적은 단 하나, '유혹'이다.

누군가의 뇌리에 각인되려면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정보가 집합된 기술이나 산업들이 스스로 브레이크를 제거하는 이유다. 포켓몬고처럼 가상의 공간에서 존재하는 게임들이 현실 속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게임에 적용되는 증강현실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무너뜨려 초현실을 구축한다. 기술이 집약된 빅데이터는 극명하게 불투명한 인간의 미래를 투영한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무한욕망을 충족시켜줄 것이다. 반면, 이 세상에서 인간의 설자리를 급속하게 잠식하고 인간성의 사막화를 주도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대안 없는 초월을 중단하거나 속도를 줄일 생각이 없다. 경쟁에서 이긴 정자의 관성 때문이다. 정자들의 세상에선 이겨야만 존재할 수 있고 주목받을 수 있다. 스포츠인들과 그들을 바라보며 반응하는 양태가 함축적으로 정자의 세계를 나타내준다.

하늘을 날아올라 바람을 지치며 다른 방향으로 수차례 공중제비를 한다든가, 에어덩크 같은 체공시간의 한계를 늘려가는 종목들은 '더 높이' '더 멀리'라는 극한에 함몰되어 있다. 인간은 선수들의 몸이 위험에 내던져진 아찔한 순간을 마주하며 전율한다.

그리고 지면을 떠났거나 빙판을 떠났거나 선수의 몸이 중력을 극복하고 안전하게 착지할 때, 또는 떠올랐다가 착지하는 과정에서 몸의 선이 그려내는 사위사위를 아름답다며 탄성을 지른다. 그런 대리만족의 카타르시스는 광기에 가깝다.

'더 빨리'를 목표로 하는 종목들도 다르지 않다. 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기록을 깼을 때 선수나 관중들은 하나가 되어 도착적인 쾌감의 도가니에 빠진다. 격투기 현장은 그 광기의 결정판일 것이다. 타격을 교환하고 중심을 무너뜨리는 파괴력에 환호성을 지른다.

관객의 입장에서 격투기의 가장 강렬한 묘미는 위기의 순간에 극대화하는 선수의 반사신경이다. 무너지던 선수가 미처 의식하지 못한 순간에 반격을 가하고 그 결정타에 상대 선수가 나가떨어질 때 열광하는 것이다.

투혼은 무의식을 깨운다. 무의식은 의식보다 빠르고 강하다. 아니, 의식은 무의식이 떠오른 순간 마비된다. 의식이 신체에 정한 모든 제한 수위는 무의미해진다. 무의식에 점령된 심장은 미처 날뛰고 근육은 감당할 무게를 망각한다.

설령 근육이 파열되고 탈골되더라도 총알 같은 펀치를 날리고 킥을 날리고 기중기처럼 밀어붙이고 들어 올려 내동댕이칠 것이다. 심장이 터지거나 뇌가 정지되지 않는 한, 무의식은 오직 살아남기 위해 몸을 막다른 지점까지 몰아붙인다.

생존하지 못한다면 멀쩡한 몸을 어디에 쓸 것인가. 무의식은 다름 아닌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성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의 스포츠 경기는 욕망의 산물이다. 살기 위해 싸우고 이기기 위해 한계를 넘고 한계를 넘으면 주목받게 된다.

욕망의 궁극에는 번식을 위한 짝짓기가 있다. 생물로서 인간은 유전자 릴레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 주목받으면 사랑할 기회를 더 많이 얻게 된다. 사랑의 콩깍지는 무의식의 발로다. 이성적으로 설명될 리 없다.

알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봉인 해제

밀란 쿤데라는 자신이 간파한 지극히 비합리적인 사랑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발가벗겼다. 누구와든 딱 한 번 사랑을 나눈 뒤 관계의 종지부를 찍는 자유분방한 연예 철칙을 지닌 주인공 토마스는 그날도 역시 그저 하룻밤 불장난을 상상하며 시골의 한 카페 여종업원 테레사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넸는데, 그로부터 3주 지난 오늘 결혼을 고민하는 처지가 되어 당혹감에 빠져 있다.

카페에서 스치듯 처음 만난 이후 겨우 두 번 만난 사이인데, 테레사는 서로 사랑을 나눈 뒤 독감에 걸려 일주일 동안 토마스의 침대를 점령했고, 토마스는 끙끙 앓고 있는 테레사를 보면서 동정심을 느끼다가 어느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용납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감정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죽은 뒤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는 기이한 확신이 들었다. 그녀 곁에 누워 그녀와 함께 죽고 싶기까지 했다. 그러나 오늘 돌이켜보면 그것이 사랑의 감정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사리에도 어긋난다. 히스테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희극을 위해 이것이 사랑이라고 스스로를 속인 것은 아닐까.

그는 심사숙고했지만 명료해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히스테리인지 사랑인지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 깨달을 뿐이었다.

상황은 너무나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더 나아가 자기감정의 진실조차 알 수 없다. 자기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는 결국 결정 불능 상태에 빠진다. 그는 결국 선택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테레사는 선택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토마스는 결국 테레사에게 선택 당한다. 그러면서 결코 알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사랑으로 치부함으로써 인지부조화의 불편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테레사가 자기 침대에서 앓고 있을 때 돌연 떠오른, 그녀가 바구니에 담긴 채 강물에 떠내려 온 아기 같다는 생각을, 자신이 건져주지 않으면 강물에 휩쓸려가서 죽고 말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을 받아들인다.

토마스는 동정심을 위험한 메타포에 실어버림으로써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의 드라마로 자신을 끌어들여 버리고 마는 것이다. 무의식에 지배받는 이의 존재는 이렇게 깃털보다 가볍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상황으로부터 누구라도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등장한 '가짜뉴스'나, 이 땅의 광장에 등장한 대통령 탄핵반대 시위대를 보면서 그런 인지부조화를 우려한다.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의식이 있는 상태'와 동떨어진 군상들의 발호를 보면서 그 원인을 생각해 보게 되는 오늘이다.

의식이 무의식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학습이 필요하다. 더구나 무의식을 풀어놓더라도 적정수위를 조절하기 위해서는 단련이 필요하다. 오직 팩트 위에서 개인의 주장이 제기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팩트를 가리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인간이 오직 생존을 위해 무의식의 봉인을 해제하는 것은 자멸을 초래하는 짓이다. 무의식의 출입은 의식의 진화를 위해 필요한 만큼만 허용돼야 한다. 그 학습은 어렵더라도 피해서는 안 될 인간의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