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있어야 할 곳에서 제 역할을 다 할 뿐이다. 누가 시킨 일은 아니지만, 오래 전에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현장의 진실을 외면 해서는 않되는 입장에서, 중도에 도망치거나 방관하는 것은 은폐하려는 쪽에 동조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현장이 그렇게 말해준다.

설령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을지라도, 그 위험이 진실이라면 그것을 반드시 카메라에 담아야 했던 것이다. 담담한 눈 빛이었다. 그렇지만 인간의 도시가 금수만도 못한 혹은 지상에 존재할 리 없는 괴수들에게 점령당하고, 그 망설임없는 공격에 속수무책인 사람들을 목도하면서 그 믿을 수 없는 사실 앞에서 패닉상태에 빠져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무지'의 무모성과 '호기심'의 저돌성이라는 두개의 거울에 1980년 5월 그날들의 광주를 비춘다. '무지'는 광주를 통제하는 힘에 의해 발생한 광주 밖의 현상이고, '호기심'은 과도한 통제(계엄령)를 향한 저널리즘이다.

왕복 10만원을 벌 생각에 들떠서 다른 기사의 기회를 가로챈 서울 택시기사 김사복은 '무지'를 대표하고, "기자는 안전한 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일본을 떠나 대한민국에 잠입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호기심'을 대표한다.

우여곡절 끝에 광주로 승객을 싣고 들어간 택시기사의 시선은 군인들과 맞서는 광주시민들을 서울에서 생업을 방해하는 학생 데모대와 동일시한다. 일상에서 자기 본분을 다하지 않고, 왜 거리로 몰려 나와 여러 부작용을 야기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런 눈은 무방비 상태다. 데모 현장에서 중상을 입은 환자들이 병원에 쇄도하고, 거리는 텅 비었으나 광장에 몰려드는 시민들, 클로즈업 되는 풍물패 말고도 자기 재능을 불태워 저항을 독려하는 참여자들, 주먹밥을 나눠주는 여성들, 그런 결속 혹은 순수한 표정들을 지근거리에서 보면서도 위기의 광주를 실감하지 못한 채 택시기사는 자기 일상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빌딩 옥상에서 내려다 본 금남로, 연속발사기가 굉음을 일으키며 내뿜는 최루탄, 군인들이 시위대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무차별적으로 휘두르는 몽둥이, 뿌연 최루 연기 속에서 솟구치는 단말마적인 비명 소리, 매운 냄새와 피비린내가 뒤섞여 진동하는 아비규환의 현장, 그것들은 '왜' 라는 질문도 던지기 전에 택시기사를 덮친다.

진실을 포착한 기자가 옥상을 떠나 금남로 현장 속으로 들어가려 할 때 그를 가로막는 택시기사는 불의의 일격을 당한 외지인이다.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구나' 그곳에는 군인들과 시민들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오직 사냥꾼과 사냥감만 있을 뿐이었다.

사냥감은 살기 위해 사냥터에서 도망쳐야 한다. 그러나 사냥감들은 어리석게도 사냥꾼들 앞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다. '불의는 물러가라'며 온몸을 던져 저항하고 있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몽둥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물러가라", “너는 사냥꾼이어서는 안 되며, 나는 사냥감이 아니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겨눈 총구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총구들이 불을 뿜고, 사람들이 쓰러지고, 총탄은 총상을 입고 쓰러진 사람을 부축해 현장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도 용납하지 않고, 그래도 시민들은 “나야! 나! 대한민국 국민!”이라며 눈앞의 사실을 끝내 믿지 못해 물러서지 않고, 총질도 끝내 멈추지 않고.

시민들에겐 다른 말도 다른 생각도 없었다. 오직 ‘총알을 받고 쓰러지는 나를 봐라. 내가 너의 총탄에 쓰러져야 할 대상이 맞느냐'는 질문 뿐이었다. 하지만 택시기사에게 그것은 영웅들의 이야기. 딸을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는 가장으로서 국민을 상대로 사냥질하는 광기 앞에 나서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었다.

택시기사는 도망쳤다. 웬만한 광주 택시기사들도 잘 모르는 비포장 산길을 통해 광주를 빠져나갔다. 산아래 맞닿은 곳은 순천, 택시기사는 딸에게 줄 신발을 사며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끽했다. 밥을 먹고 출발할 요량으로 식당에 들렀다.

그런데 적어도 식당 안에 있는 순천 사람들은 정말 바로 인접한 광주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진실은 뜬소문으로 뭉개지고, 보도통제 아래 언론이 생산한 허위 사실이 정설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같은 은폐와 왜곡 앞에서 보통사람 택시기사는 비로소 자기 본연의 책무를 깨닫는다.

폭도들에 의해 군인들 몇 명이 죽은 것이 아니라, 무고한 광주시민들이 광포한 권력의 개들에 의해 주검의 산을 이루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외부 세계에 알려야 했다. 그런 의지를 가진 자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를 자기 재능을 다해 어떻게든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그것은 자신을 대신해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보답이었다. 그는 광주로 돌아가 넘쳐나는 주검 사이에 앉아 넋을 잃고 있는 기자를 일으켜 세운다. '어서 사진을 찍어라', ‘광주의 실상을 그대로 담아 외부 세상에 알려라’.

기자의 동영상 카메라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건조해야 할 그의 태도는 무너져 있다. 카메라에 담기는 참상, 그 깊숙한 곳에 들어와 고립된 자신, 그의 표정은 분노와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다. 그러나 누구도 그에게 저널리스트로서 객관적 태도를 견지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의 태도는 공적인 감정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일본에서 광주의 소식을 듣고 참신한 뉴스거리가 광주에 있을 것이라고 직감하는 기자의 촉은, 계엄령과 폐쇄된 도시 그 내부의 예사롭지 않은 상황에서 도출됐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각오가 된 광주행이었다. 진·출입을 가로막은 군인들, 적막강산의 거리에 어지러이 날리는 충돌의 잔해들, 트럭에 올라탄 시위대들, 다친 사람들 등 그의 시선은 당초에 예상했던 것들을 따라갔다.

하지만 그것들이 악마의 아가리로 유혹하는 미끼였다는 것을 그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전쟁터, 아니 양민 학살장 한복판에 들어가게 된 그는 자신마저 사냥감의 신세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퇴로를 걱정할 겨를이 없다.

언론이 침묵하면 안 되는 이유

있어야 할 곳에서 제 역할을 다할 뿐이다. 누가 시킨 일은 아니지만, 오래 전에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현장의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입장에서, 중도에 도망치거나 방관하는 것은 은폐하려는 쪽에 동조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현장이 그렇게 말해준다.

설령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을지라도, 그 위험이 진실이라면 그것을 반드시 카메라에 담아야 했던 것이다. 담담한 눈빛이었다. 그렇지만 인간의 도시가 금수만도 못한 혹은 지상에 존재할 리 없는 괴수들에게 점령당하고, 그 망설임 없는 공격에 속수무책인 사람들을 목도하면서 그 믿을 수 없는 사실 앞에서 패닉상태에 빠져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극강의 공포는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할 때 조우한다. 비상식적이며 비정상적이어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설명하려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그 공포의 현장을 직접 보여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공포를 어딘가에 온전히 담아야 한다.

영화 택시기사는 그 공포를 극복하며 현장을 누비고 사선을 빠져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오직 주어진 소명을 다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비단, 김사복이나 위르겐 힌츠페터뿐만 아니라, 광주 택시기사들, 의사와 간호사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포착한 이름의 광주시민이거나 포착하지 못한 광주시민이거나.

죽었거나 다쳤거나 살았거나, 모두 그래야만 했던 사람들이다. 나에게 택시기사가 오늘 이렇게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꽃다운 나이에 그 공포의 광주 언저리를 배회했던 기억 때문이리라.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군인들이 폭도들을 진압했다고 믿던 시절에 서울살이를 한 기억 때문이리라.

아무리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도 진실을 믿지 않던 사람들 앞에서 또 절망해야 했던 그 긴 광주의 아픔이 가슴을 저미는 오늘이다. 그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해원했다 할지라도, 영화 택시운전사는 언론밥을 먹고 있는 나에게 다시 한 번 진실 앞에 침묵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