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세상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세상 속에 숨지도 않는, 일상을 살되 첨예한 쟁투에 얽히지 않는 중은(中隱)은 어쩌면 보통사람들이 사는 모습이다. 여러 크고 작은 정치적 갈등에서 자유로운 상태, 그러나 필요한 만큼은 노동하는 사회생활 정도를 중은으로 삼는다면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보통사람들은 지극히 드물 것이다.

하지만 누구든지 자신이 이르렀다 생각하는 중은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란 쉽지가 않다. 우리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새로운 것만이 경쟁력을 갖는 시장에서 오직 보상을 받기 위해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인 우리는 만성 소화불량에도 익숙하다.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오는 새 제품들의 유혹에 완전히 노출된 우리는 더 많아진 매뉴얼을 다 익히기도 전에 멀쩡한 제품을 버리고 새 제품을 구입하는 일이 다반사가 됐다. 공급자는 끊임없이 다각적인 방법으로 과소비를 부추기고, 첨단 장비들은 매순간보다 증강된 현실을 지원해 매스컴의 광고에 역동성을 더한다.

우리들의 욕망이 곧 착취자들의 서식 환경이며, 무한경쟁과 그에 따른 경제적 불공정을 허용하는 신호다. 특히, 욕망의 불길은 필경 탐욕으로 번지게 마련이다. 우리가 필요 이상의 것들을 소유하고 소비하는데 노동력과 시간을 아낌없이 소모하는 것이 그것을 단적으로 방증한다. 자본주의 국가의 성장이란 부가가치가 높은 탐욕들을 충족시킨 과실이다.

우리는 결국 탐욕의 노예라고 말할 수 있으며, 늘 허기를 느끼면서 그 허기를 채우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 존재가 되었다.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결과다. 더구나 어떤 가치관이나 태도에도 치우치지 않는 최소한의 필요(욕망)조차도 충족하지 못해 허덕이는 사람들이 우리들 가운데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통속적인 그 필요의 수준도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정도의 욕망인지, 또는 탐욕에 기운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볼 가치는 분명히 있다. 우리들의 소비에 대한 인식이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 때의 상대평가는 절대평가를 가장해 보편성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우리들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다'는 간디의 명제가 강렬한 흡인력을 갖는 이유다. 사실, 우리가 중은(中隱)의 가치를 일상에서 누리기 위해서는 중은에 도달했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위(自慰)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경제학적인 면에서 소비자의 효용과 가치는 단순히 물질적 소비에 치우쳐 있다. 따라서 안정적인 생존 조건을 확보한 뒤에 그 이상의 행복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풍요가 필수 요소다. 속도를 줄이고 여유를 갖는 것만이 생산과 소비 전반에서 과잉을 막는 길이기도 하다.

'승리'와 '패배'로 대별되는 시장경제는 필연적으로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를 낳게 되어있다. 승리하는 쪽조차도 순간적으로는 만족을 얻을 수 있겠지만, 승패가 반복되는 경쟁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종국에 정신과 육체를 모두 해치고 만다. 피해의식과 불신으로 피폐해지고 영 안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목숨을 걸어도 노동권을 잘 지키지 못하는 현실에 놓여있다. 우리가 어떻게 망가지고 있는가의 다른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현실이다. 행복은 비경제적인 곳에서 더 많이 길어올려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비경제적인 가치에 우리가 주목할 때 시장의 불균형은 완화되고 공생의 가치가 힘을 얻게 된다.

주변을 돌아볼 수 있고, 성찰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왜 이 세상에 왔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자각할 수 있다. 그래서 속도를 줄이고 보면 "망각은 속도에 비례한다"는 밀란쿤데라의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속도 하나만을 생각해야지 다른 것을 생각하면 위험하다. 운전중에 속도가 높아질수록 사람들의 머릿속이 비워져가는 까닭이다. 2015년 첫 달이 가기 전에 우리는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는 우리가 도대체 얼마나 빠른가도 한 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도 있겠다.

성장 맹신에서 벗어나 균형을 잡아가기

우리가 경쟁력이라고 생각하는 속도, 우리가 내는 실제 속도는 어떤가. 가령, 우리가 자동차로 내는 속도를 측정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자동차를 위해 소비하는 시간을 속도로 환산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속도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시장경제 아래서 속도를 내는 궁극적인 목적은 돈을 벌 시간이 필요해서이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속도를 내기 위해 투자하는 시간과 노동력 등 직접 소비하는 시간을 비롯해 자동차를 사기 위해 투자한 시간, 기름을 사기 위해 투자한 시간, 보험료와 세금을 벌기 위해 투자한 시간, 교통위반 범칙금 등을 벌기 위해 투자한 시간 등을 거리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일까.

이반 일리히에 따르면, 전형적인 미국인의 경우 연간 12,070킬로미터를 달리는 데에 1,600시간을 소비한다. 이를 시속으로 치면 8킬로미터 정도 된다. 인간이 걷는 속도보다 월등한 수준의 속도는 아니다. 여기에 사고로 병원 또는 경찰, 검찰에서 보내는 시간이나 자동차 수리 공장에서 보내는 시간, 자동차를 사기 위해 광고를 보는 시간 등을 감안하면 자동차의 속도는 더욱 느려진다.

속도를 위한 도구에서 벗어나 속도를 줄이는 것이 오히려 더 많은 거리를 평화롭게 갈 수 있다는 역설을 말해주는 셈법이다. 도구가 사람의 자유와 자율적 능력을 빼앗고 사회의 불공정성을 확대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는 길이기도 하다.

시장경제체제하의 중은(中隱)은 급속한 발전의 틀에서 빠져나와 자기확신에 의해 공생의 담론에 참여하는 지점으로 근본적 독점을 깨는 균형이며, 생태 균형이고, 배움의 균형이고, 권력의 균형이고, 목적의 균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