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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호 전장터에서

편집국장 공인배

전쟁을 피할 수 없고 끝낼 수 도 없다면, 우리는 당장 몇가지 선택지들을 마주해야 한다. 승자가 될 것인가, 패자로서 승자에 복속 될 것인가, 아니면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할 것인가.

어떤 승자가 될 것인가. 권모술수의 귀재로서 단기간에 부와 권세를 거머쥘 것인가. 대의명분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은근과 끈기로 목적을 달성할 것인가. 어떤 패자가 될 것인가. 승자에 빌붙어 살 것인가. 주체적인 노동을 통해 자존적 삶을 살 것인가.

어떻게 도전할 것인가. 공격과 패퇴를 거듭하며 불굴의 의지로 상대를 흔들며 계속 빈틈을 파고들 것인가. 힘을 모으고 준비하며 때를 기다리는 전면전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직접 상처와 결핍을 감당해야 하는 전투를 피하고, 어부지리(漁夫之利)나 이이제이(以夷制夷) 같은 간접수단을 동원하는 전략적 전쟁을 도모할 것인가.

크고 작은 전쟁들의 교훈이나 병법서들이 가리키는 것을 보면 승자가 되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매우 단순하다. 유리한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는 것이다. 그래서 접전은 최후의 상황이고, 그 이전에 전쟁 당사자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지형과 모든 상황들, 그리고 자신을 상대로 싸워 이겨내야 한다.

승자들의 공통점이 '치열'인 이유다. 목표에 다가갈 타이밍을 잡기 위해서는 치밀한 준비와 긴장을 늦추지 않는 열정이 필요하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만물은 서로 더불어 변화를 멈추지 않기에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상대의 동태에 적절히 대처해야 하기 때문이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각자가 자기 무게를 감당해야 하며, 각박한 현실을 극복하면서 종국에는 자기를 직시하고 상대방을 이해해야만 승기를 잡을 수 있다. 최강자들의 승부에서 상대방의 의도와 움직임을 간파하는 눈이 서로 대동소이했던 것은 목적과 수단이 큰 틀에서 같았기 때문이다.

병법서의 원조인 '육도삼략'을 저술한 강태공 역시 승리는 전장터가 아닌 후방의 일상에서 결정된다고 했다. 사람들과 시름을 함께 나누고 즐거움을 더불어 기꺼워하며,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함게 꺼리는 행동이 '정의로움'이고, 이 정의가 있는 곳으로 천하의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했다.

본래 사람이란 모두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좋아하며, 덕을 좋아하고 이익을 좇게 마련이니,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과 진정한 이익을 돌려주는 데 힘쓰는 것이 승리의 길이라고 했다. 살려주기를 좋아하고 다치게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자연의 도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전쟁은 불길한 흉기다. 전쟁은 즐기는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다. 포악한 자나 어지럽히는 자를 베어버리기 위해서만 공격한다는 게 육도삼략이 제시하는 전쟁의 방향성이다. 자연의 도리를 따르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 있는 것과 같다. 물고기는 물을 벗어나면 죽고 만다. 리더가 자연의 도리를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이유다.

정의로운 군대로 불의한 적을 공격하는 것은 마치 댐에 가뒀던 강물을 터서 조그마한 횃불을 끄는 것과 같지만, 때로는 담담하고 느긋하게 움직이며 서둘러 진격하지 않는 것은 사람이나 물자가 다칠까 염려했기 때문일 따름이다.

강태공의 이같은 전쟁관은 그가 실현한 승리의 토대 위에 세워진 지표이기에 3천여년의 세월을 초월해 우리 앞에서도 빛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기원전 1046년 2월, 4만5천의 주나라 군대로 72만의 은나라 대군을 대파한 기적의 목야전쟁(牧野戰爭)을 이끈 장본인이다.

당시 은나라 주왕의 폭정으로 천하는 비탄에 젖어있었고, 정의의 이름으로 불의를 섬멸한 강태공은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정법을 확립했다. 이를 계기로 강태공을 왕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주나라는 대륙의 스승국이 되었으며, 천하는 하나의 기치아래 통일됐다.

육도삼략은 훗날 손자병법의 전범이 되었다. 전투 장비，전투 대형，탈출작전，전략과 대치 요령，매복작전 수행과 명령체계 구축，보급로의 단절，적국의 영토점령，화공전술 등의 구체적 전략을 세세히 논하고 있고，숲에서의 싸움，늪지에서의 싸움，돌격전，강적과의 전투 시 열세의 극복 등 개별 상황에서 군사전략상의 우세를 확보하는 문제를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정의와 평화 구현'이라는 확고한 도덕적 명분이 없는 전쟁은 반드시 패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전쟁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강해졌다면 모든 상황에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며, 종국에는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굳이 전투를 해야 한다면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때를 포착하고, 그 순간을 최고로 만들 수 있는 자신의 역량이 확인 되어야 한다. 전쟁은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 속성이 승패를 가리는 것인 만큼 피하려면 항복하면 그만이니까. 전쟁은 무릇 적극적으로 상대방의 생각을 읽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전쟁은 삶의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자신과 호각세를 이루는 상대와의 팽팽한 승부가 삶의 목표가 될 수도 있다. 철저한 준비와 단호한 결정, 신속한 추진과 완고한 태도 견지 같은, 승리를 확신하며 실수의 여지를 최소화 하는 과정에서 펄떡이는 가슴은 그 나름 한 판 인생의 전부일 수도 있다.

전쟁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영웅들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갈량과 사마의는 평생 사선을 넘나드는 전장터를 누비면서도 서로에 의해 희열을 느끼는 맞수의 전형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역량 면에서 개인차는 명백했다. 제갈량은 젊은 나이에 유비 집단의 핵심간부가 되어 단기간에 파죽지세의 중원 강자들을 제압했고사마의는 냉철한 조조에게 기용되어 끊임없는 견제 속에 힘을 키워나갔다.

너무 많은 것을 가졌기에 끊임없이 고뇌하고 사람들 사이를 중재하며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던 제갈량과, 삶의 현실적 제약 속에서 개인적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험난한 인생을 산 사마의는 라이벌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반드시 승리하는 계책을 내는 사람' 제갈량과 섣불리 패를 보이지 않고 승기를 얻는 절제의 정수를 보여준 사마의는 서로 판연히 달랐기 때문에 더욱 역동적으로 전장터를 누볐을 것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일시적인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의연함이었고, 긴 시기를 바탕으로 관찰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패배를 승리로 역전시켜나가는 힘이었다. 또한 그들은 마지막까지 승부에서 비켜서지 않았다. 제갈량은 내부의 신뢰 하나로 모든 열악한 조건을 극복하면서 노년에도 다섯차례나 북벌을 감행했고, 사마의는 그것을 모두 막아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가운데 제갈량은 사마의에게 패했고, 사마의는 삼국사에서 삼국을 통일한 최후의 승자가 되었지만 영광을 맛보기도 전에 패망하고 말았다. 사실, 인간은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수많은 전투에서 이기더라도 도전받지 않는 지위를 확보할 수는 없는 탓이다.

제갈량과 사마의는 수많은 전투에서 이기고도 자기를 지키지 못해 덧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장수들과 다르지 않은 최후를 맞이했다. 다만, 그들이 빛나는 것은 끝까지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치열하게 살았다는 것 때문이 아닌가 한다. 나아가 그들이 남긴 것은 그들이 '전쟁없는 세상'을 꿈꾸었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지금 우리의 전투는 전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벌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