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등은 두 세기 전, 수많은 프랑스 시민들이 부패한 왕정에 맞서 흘린 피로 쟁취한 권리다. 이 나라는 그로부터 156년이 지난 뒤에 조선왕조를 벗어났지만, 무늬만 민주주의였던 암흑기를 거치면서 '시민'은 광풍의 한 복판을 피하지 않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그 가시밭길 구비구비에서 제물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안전하지 않다. 프랑스 대혁명을 무위로 돌이키기 위해 유럽의 모든 전제군주들이 '신성동맹'을 맺었던 것 처럼, 한 세기 전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들불 같은 공산주의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반공동맹'을 맺었기 때문이다. 분단 민족의 땅 한반도에 봄이 오지않는 이유다.

더구나 우리는 어느 순간 길을 잘못 들어 혁명 전야인 226년 이전의 프랑스 구체제 상태로 돌아갔다. 당시 프랑스 전체 인구의 2%밖에 안되는 기득권층이 주요 권력과 부와 명예를 독점했듯이, 지금 이 나라 재벌들을 비롯한 특권층 역시 권리를 폭식하는 나머지 날로 비대해지고 있다.

반면, 98%의 제3계급은 정치와 경제를 떠받치면서도 무거운 세금을 부담하고 있으며, 과도하게 비좁은 기회의 문 앞에서 무한경쟁을 벌인다. 역사는 이렇게 돌고 돈다. 터무니없게도 민주주의의 한 복판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사회체제에 항거해야 한다"는 말이 쟁쟁하게 울린다. 두 세기 전에 루소가 세상을 향해 외쳤던 말이다.

돌아 보건데, 체제는 투쟁의 산물이다. 또한 그것을 정상화 하기 위해서 또는 유지하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저항해야 한다. 공동체를 이루는 우리는 이렇게 숙명적으로 투쟁의 연속선상에 놓여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극히 제약 된 환경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선, 분단의 현실은 자유로운 담론을 언제든지 제한할 수 있는 마성(魔性)의 원천이다.

골목대장 같은 헛소리를 지껄인 이석기 등을 빌미로 정당을 해산시키고, 그런 사건이나 행위와 전혀 무관한 국회의원들에게 연대책임을 물어 자격을 박탈하는 나라다.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에 의해 선출되어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대표성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빼앗아도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지 않는 나라다.

내란음모와 국가보안법의 칼자루를 쥔 국정원은 조직적으로 대통령 선거에 개입해 특정 후보를 지원하고, 당시의 수장과 실행범들이 사법적 처벌을 받아도 끄떡이 없다. 나아가서는 그 수장이 국정의 심장부인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는 나라다. 선거법 위반 논란의 대상이 되어 정통성을 의심받는 정권이 이렇게까지 망발할 수 있는 힘은 오직 남·북 냉전에서 나온다.

우리가 지나온 성장제일주라는 긴 터널은 '국력은 방위력'이었던 시절이다. 전쟁 억지력을 위해 모든 국민이 희생해야 했고, 철권통치의 구실이었다. 하지만 그 충성스럽던 국민들은 여전히 무한경쟁의 질풍노도 속에서 허우적이고 있다. 잠재 된 전쟁의 위기를 내세워 조장하는 전체주의, 혹은 집단주의에 매몰된 결과다.              

개인을 존중하지 않고는 민주주의가 바로설 수 없는데도, 집단에 기여하는 이타주의를 찬양·고무하고 이기주의를 공공의 적으로 간주하는 도덕적 슬로건이 맹위를 떨치는 나라다. 이타주의는 애국심과 동일한 이데올로기이기에 소수 재벌기업들의 성과를 국민들이 골고루 나누어 갖는 국민총생산 수치를 숭상하고, 관제적 통계수치인 한 자리 청년실업률이나 두 자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수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일자리의 원천인 재벌 기업의 경영과 투자는 나라경제와 노동시장의 중대 변수가 되고, 부(富) 독점은 이타주의가 보호한다. 그러면서도 재벌은 실질적으로 부를 사회에 환원하지 않고, 개인은 생산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얻지 못한다. 이런 모순 된 시스템 속에서 착취당하는 자의 고통은 오히려 착취 조차 당하지 못하는 자의 고통에 비교되며, 착취 당하는 자의 투쟁은 그렇지 못한 이들의 질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런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마르크스주의가 유용하기도 하지만 그런 목소리는 완고한 반공 이데올로기의 장벽을 넘지 못한다. 특정한 경제학, 혹은 학문이 체제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기는 보수주의, 혹은 전체주의 교육과 시스템이 그 장벽이다. 이는 선택과 누려야 할 권리는 제한하고 의무를 극대화하는 기제다.

냉전 전선이 형성한 이타 지상주의는 이렇게 소통을 가로막고 단절을 고착화하며, 이 나라 공동체 내부에 수많은 모순의 지뢰를 설치한다. 그 가운데 가장 파괴력이 높은 지뢰는 북한을 향한 이타주의를 제거하는 법의 엄존이다. 이타성만을 선으로 보는 가치관이 정의롭지 못한 국가 집단의 자양분이 되었던 것이다.    

시민에게 이타주의 강요하는
특권층의 일그러진 이기주의

사실, 이 나라의 양민들은 지극히 이기적인 집단으로부터 이타적 헌신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하물며 누가 투쟁을 꿈꾸겠는가.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에서 주장할 불만이 무엇이겠는가. 더 나은 삶을 영위하려면 더 분골쇄신하여 회사의 이익을 넘치게 하라. 자본의 노예들이여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현장을 나서지 마라.

그 길은 너희의 자멸의 길. 아무도 너희에게 동조하지 않는 가혹한 현실에 예상치 못했던 절망감을 맛보리라. 너희의 말을 누가 듣겠느냐, 이 태평성대에. 경쟁주의보다 더 높은 도덕성이 있더냐. 너희는 곧 부도덕이라는 오명을 쓰고 말라 비틀어져 가리라. 죽은자들 보다 더 고통스러운 남겨진 자들의 지옥에 떨어지리라.

신자유주의의 그런 계명은 아마도 우리들 가슴 안쪽에 한 세기 동안 돋을새김 되었을 것이다.

삭풍에 부릅뜬 푸른 눈으로 백주 대낮에 현장과 현장 밖에서 벌어진 노동자들의 참상을 수 없이 목도했고, 그와 동시에 권력과 재벌 그리고 사회체제의 일그러진 표정을 맞닥뜨려야 했다.

이 나라의 부당한 정의와 굴절된 국민의식은 오직 3.8선에서 비롯한다. 국민들의 불안은 끊임없이 악용되며,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더 깊이 뿌리를 내리는 구실이다. 96주기를 맞이한 3.1독립만세운동 주간을 지나면서, 일본의 강점에서 벗어난 우리가 다시 열강들의 냉전과 자본주의에 강점당한 채 한 세기를 감당해 온 기막힌 현실을 이렇게 마주한다.

총칼 앞에 가슴을 내밀고 뛰어들었던 그 날을 생각한다면 통일의 노래를 목놓아 부르지 않을 시민이 어디 있겠는가.

통일만은 능동성과 온기를 잃지 않으며 간단없이 도모하기를 이 나라 정부에 바란다. 또한 통일을 해태하거나 남의 눈치를 보거나 남이 하자는 대로 하는 정부에 진영을 초월한 질타들이 쏟아지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