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변의 얼음 녹은 물이 올라 이른 봄소식을 전한다. 산 허리까지 지천으로 흐드러진 백매(白梅)는 흡사 눈발 같아서 아래서 올려다 보니 하늘도 온통 하얗다. 눈속에 핀다하여 설중매라지만 나무에 핀 꽃이 눈 처럼 보여 설중매 일 수도 있겠다. 간혹 흩날리는 꽃잎이 그런 착시에 실감을 더 한다.

  봄은 그렇게 몽환적으로 다가왔다. 물 길이나 꽃 길이 땅 위에만 있는 게 아니라 땅 속에서 하늘로도 이어진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달 그림자 처럼 끼치어 축농증을 뚫고 파고드는 향기란 내밀한 땅 속에 은둔했다가 물 길 따라 올라온 하늘의 정수(精髓)이리라.

  갓 피어난 꽃이 이렇게 농염하다는 것은, 천리를 간다는 것은, 겨우내 설한풍이 닿지 않는 땅 밑에서 경계를 극복하는 몸살을 앓았다는 방증이다. 아직 벌거벗은 대지 위에 선 숫처녀의 냄새가 수많은 곡절을 겪어낸 증류주 처럼 사람을 취하게 한다는 건, 대지의 심연에 흐르는 맑고 독한 주천(酒泉)에 만취하여 긴긴 밤들을 뒤척인 속내를 지녔기 때문이리라.

  내가 꽃을 보러 갔지만, 꽃이 먼저 나를 보고 반했으리라. 그렇지 않고는 설명되지 않는 밀도 높은 밀어들이 허공에 가득차고, 온 마음을 연 눈빛으로 나를 절절하게 원하지 않으리라. 18세 두향도 그랬다. 48세 단양군수 퇴계가 그녀를 맹목적으로 사랑하게 된 이유다.

  당시 아내와 자식을 잇달아 잃은 퇴계는 시(詩)와 서(書) 그리고 가야금에 능한 관기 두향을 어떤 풍류도 대신하지 못할 봄소식으로 맞이했다. 그러나 만난지 9개월만에 두 사람은 생이별의 숙명 앞에 마주 앉았고, 두향은 무너진 하늘에 짓눌려 넋을 잃었다.

  퇴계는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고 슬프다"며 기약 없는 내일을 두려워했다. 두향은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며/ 어느덧 술 다하고 님 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며 21년이라는 긴 이별을 예견했다.  

  퇴계가 남은 여생을 곁에두고 애지중지한 매화 화분은 두향이 짐 속에 넣어 준 것이었다. 그는 그 매화에 온전한 사랑을 쏟았으며, 마지막까지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숭배했다.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한 마디도 "매화에 물을 주어라"였다.

  그리워하는 것 말고는 허용되지 않는 속박의 사슬을 절감하면서 퇴계는 차라리 매화가 되고 싶어 시를 썼다.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지극하면 서로 통한다. 두향은 퇴계의 건강을 빌다 정화수가 피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퇴계의 타계를 직감했다.
소복차림의 두향은 단양에서 도산서원까지 4일을 꼬박 걸어가 죽은 퇴계를 만난 뒤, 단양으로 돌아와 남한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변고를 알린 정화수는 퇴계가 두향에게 보낸 도산서원의 우물물 이었다. 퇴계는 두향이 보내온, 단양에서 함께 기르던 난초를 받고 잠을 이루지 못하다 우물물을 손수 길어 두향에게 보냈던 것이다.

  두향이 차마 마시지 못하고 정화수로 썼던 물, 그것은 두향과 퇴계의 사랑이 오가는 길이었을까. 혹은 매화의 정수였을까. 분명한 것은 두향도 퇴계도 모두 물길과 꽃길 위에서 거리와 쇠락을 초월한 사랑을 품고 노래했다는 점이지 않을까. 이제는 두향도 퇴계도 모두 매화일까.   

       
  자기를 다 태운 이 만이 찬 기운을 뿜어 올릴 수 있고, 자기를 잃지 않는 이 만이 먼 곳에 있는 이의 기억에 형형하며, 섬기고 간직하는 이 만이 불멸할 수 있다면, 그와 같은 꽃이 매화이기에 매화를 꽃 중의 꽃이라고 일컫는다면, 매화의 자취는 바람이고 매화의 정신은 물이다.

  퇴계가 매화를 동경하고 심지어는 매화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했던 까닭이 아닐까. 바람 처럼 자유롭고 물 같이 순리를 따르되 천지간 어디로 난 길이든 가지 못하는 곳이 없는 존재를 꿈꾸었던 것은 아닐까. 세속의 틀 속에서 중력을 절감할 수록 커져가는 탈속의 경계에 매화가 서있다.

  다압면 섬진마을에 구름 처럼 몰려든 사람들은, 엄동설한을 지나온 자신과 인고 끝의 환희를 봄 빛으로 드러낸 매화를 동일시 하는 것이리라. 때에 이르렀기에 성사된 상봉에 겨우내 가슴에 사무쳤던 그리움을 토하리라. 그것은 말을 이루지 못하는 탄성, 기꺼이 기화된 몸의 쇄도.
뜻이 필요치 않는 상봉은 저마다 가슴속 매화 언저리를 수 없이 서성이던 불면의 끝. 천근만근 무거운 몸, 그러나 더할 나위없는 단잠에 빠지는, 무장해제의 상봉. 개별의 독백이 집단 독백을 이루는 순간. 그들의 외출은 삶의 본질적인 비극과 화해한다. 각자의 고통을 부정하지 않는 매화 앞에서.

  우리는 퇴계 처럼 매화의 혹은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그것에 기대어 혼잣말을 중얼거릴 수 있다. 우리는 갇혀있고 그 때문에 안전하다고 느끼며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라면서도, 낯설기에 위험한 사람들을 만나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매화 앞에서 다른 누군가도 똑같은 것을 보며 같은 감흥에 젖어들 것이라고 여기며 독백을 하는 이유다.

  언뜻 보기에는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처럼 보여도 기실 그것이 집단 독백인 이유는, 실제론 상대방의 이해나 응답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타인의 존재를 계기로 자기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할 따름일 것이니, 매화 앞에 몰려드는 이런 대화의 물결은 고독이 발원이다.    
그래서 독백은 치유다. 퇴계가 남긴 백여수의 매화시는 그런 자기 치유가 아니었을까. 매화에 투영되는 자신을 발견하고, 두향을 통해 경직되는 사유의 근육을 풀며, 자신이 입거나 쓰고 있는 가식과 위선을 벗어던지는 집도 행위가 아니었을까.

  독백은 대상이나 사물을 자기에게 동화(同化)시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강렬한 자기애의 발로다. 우리는 독백을 다 마쳤을 때 비로소 외부를 향해 말을 건다. 하지만 우리는 목숨이 다할때 까지 독백을 멈출 수 없다. 독백은 휴식이며 재생의 묘약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일주일 뒤면, 바람 길 따라 박차를 가하는 봄의 전령은 안동의 도산서원에 당도할 것이다. 그 곳에 운집한 사람들은 또 도산 달밤에 매화를 읊조린 퇴계의 독백 너머에서 저마다의 독백을 되뇌이리라.  

      
   뜰을 거니니 달이 사람 따라오네/ 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남을 잊었더니/ 향은 옷에 가득 달 그림자는 몸에 가득/ 홀로 산창에 기대니 밤빛이 차가운데/ 매화나무 우듬지에 둥근 달이 떠오르네/ 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 불어오니/ 맑은 향기 저절로 집안에 가득 차네/ 너에게 한 잔 술을 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천 년 그리움에 눈물만 가슴을 적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