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오늘을 사는 우리는 누구나 적잖은 빚을 지고 산다. 채권자들은 오늘을 위해 어제 희생된 이들이다. 수많은 이들이 자기 목숨을 개인의 기본권 보장과 바꿨다. 노동과 사회, 경제, 정치는 그 제단들 위에서 한 족장씩 새날을 밝혀왔다. 하지만 우리들의 부채의식은 희박하다.

저마다 관점이 다른 탓이다. 5.18을 보더라도 정부와 시민사회의 시각차가 크다. 도대체 민주영령을 추모하는 행사장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방향성이 없는 정부다. 민주항쟁 현장에서 불렀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끝내 금지해서 시민사회가 따로 기념식을 주관하게 만들었다.

박해 현장이 잉태했고, 저항 현장이 낳은 노래다. 가슴과 가슴을 울려 민주세력의 연대 신호가 된 노래다. 현장에서 산자와 죽은자가 모두 사무치게 기억하는 노래다. 산자와 죽은자가 회우하고자 할 때의 축문이거나 향불이거나 솟대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내용을 떠나서도 격식을 행사의 처음이자 끝으로 아는 정부가 추모의식에 최소한의 격도 갖추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종북세력의 노래로 낙인찍어 5.18기념식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민주영령들을 추모하자는 기념식 지정 의미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국가가 지정한 기념일을 국가가 나서서 부정하는 행태다. 들여다보면, 노래 혹은 역사의 되새김질이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5.18 기념식은 민주정권이 지정했고, 그 추모의 정신은 이후 12년 동안 민주주의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지만, 그 민주주의는 반민주정권에 의해 다시 퇴행을 거듭한 것으로 읽힌다.

우리의 정치와 인권이 30년 전으로 되돌아간 실례는 거론할 필요도 없게 많다. 지난 7년 동안 이명박 정권의 부정과 부패, 박근혜 정권의 국민을 경시하는 막가파식 통치는 그 규모나 정도에서 건국이래 독보적이라 할 만 하다. 정권의 반성도 없고 비전도 없는 오늘은 침묵을 강요하는 민주영령들에 대한 추모식에서 비롯한다.

이 정권은 추모의 범위를 국가가 제한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유족과 시민들의 마음을 국가에서 정하는 틀 안에 가두려고 하는 것 자체가 독재적 발상이다. 억압은 부자유와 같은 말이다. 이 정권이,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영혼을 억압하는 추모식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믿으면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지정된 국가 기념일을 마지못해 의례적으로 처리하는 마음가짐이 드러난 것이라는 것 말고 달리 풀이할 건더기가 없다. 그 이면에 5.18 정신을 어떻게든 광주라는 지역에 가두려는 의도가 깔려있을 개연성을 높다. 민주세력을 종북세력으로 환치시키려는 모든 시도들이 그것을 방증한다.

혹은 이 정권의 배후와 주변은 5.18을 폭동, 혹은 사태로 조작한 전두환 정권의 마인드를 계승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무력진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선에서 물러서지 않고 극렬하게 저항한 시민들의 모습만을 언론이 보도하도록 통제하던, 진실을 구전하는 시민에게 유언비어 날조자라는 죄명을 씌워 개잡듯이 토포하던, 그 무자비한 계엄상황적 마인드가 35년이 흐른 오늘에도 거침없이 표출되고 있다.

5.18의 광주는 수구세력에게 결코 달갑지 않은 고장이다. 바꾸라는 요구가 확산되는 것을 기본적으로 바라지 않는 것이다. 5.18 35주년 기념식이 둘로 쪼개져, 정부만의 또는 시민들만의 기념행사로 각각 치러지게 된 요인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민주주의 국가에 산다. 그래서 민주세력과 비민주세력이 구분될 수 없다.

비민주정권과 민주세력이 양립하면서 서로 충돌하는 구조도 아니다. 다만, 정치적인 역학관계에서 민주주의에 반하는 세력과 정권이 끊임없이 헤게모니를 노리면서 자기영역을 확인하고 자기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생존논리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 오늘이다.

그러나 정작 더 나은 민주주의를 원하는 세력은 동력을 잃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강 수면 위에서 생존과 여가를 위한 과실을 건져올리고 있을 뿐이다. 바닥까지 저인망 어선이나 초대형 그물로 싹쓸이하는 생태계 파괴자들을 직시했던, 그리하여 NO를 외치며 시대의 제단에 몸바쳤던 이들의 관점은 사람들에게 멀다.

부당한 현실에 속거나 순응하는 일반대중과

변화 인자(因子)를 가두는 수구세력의 암약

강 수면 아래의 환경은 수면 위의 환경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제 몸에 불을 붙여 밝히거나 붉은 피를 흩뿌려 알렸던 이들이 그들만의 기억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변화를 거부하는 이들의 '변화 인자(因子)’ 가두기가 늘 성공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공동체의 부당한 오늘에 저항하지 않는 이들의 관점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소이에서 비롯한다.

언제든지 기본권을 침해받을 수 있는 구조나, 삶의 현장 곳곳의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있는 불공정 구조를 의심하지 않는 관점, 또는 알았더라도 변화를 행동하는 사람들만의 몫으로 돌려버리는 관점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세력을 돕는 가장 큰 힘이 된다. 음흉한 실체를 감춘 불완전한 민주주의에 속거나 순응하는 사람들은 어쨌든 자기가 향유하는 민주주의가 어떤 대가 위에서 실현되고 있는가를 곰곰히 생각해 볼 겨를을 가져보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수구세력들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전근대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공산주의 국가 체제 아래였다면 지금처럼 부를 획득하고 영달을 누릴 수 있었겠는가. 민주주의를 수정하는 사회 변혁기가 그들에게 기회를 안겨준 것이 명백하고, 변혁기를 견인하거나 추동한 이들이 그들에게 오늘을 안겨준 것 또한 확실하다.

그러나 일반대중 또는 수구세력들에게 부채의식은 없고, 오직 자기생존에 골몰할 따름이다. 공동체의 배는 텅 비어있고, 이로 인해 내일은 설계될 수가 없다. 이는 5.18 가해세력들의 진정한 반성과 사죄를 이끌어내지 못한 원인이다. 그들은 오히려 광주의 화해와 용서를 비웃으며, 정치·경제·사회 전반에서 암약하고 있다.

시대의 심연에 가라앉은 5.18 정신과 세월호의 진실이 인양되지 못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