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지만 게으르지 않고 순종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보은하는 기축년 '소'의 해가 저물었다. 우리는 그 뒤를 이은 호랑이 해를 새로 맞이 한다.

날쌘 포식자의 포효로 야생의 왕좌를 지켜내고 느리게 걷는 가운데서도 위엄을 갖춘 2010년(庚寅) 호랑이는 60년 만에 돌아 온 백호(白虎)다.

사신(四神) 중 서쪽을 지키고 오행 중 금(金)의 속성을 지니며, 계절 중에서 가을을 관장한다. 무엇보다 백호는 사신(四神) 가운데 유일한 실제동물이다. 불의 속성을 지니고 남쪽을 지키며 여름을 관장하는 붉은 봉황 주작(朱雀)을 비롯, 물을 상징하고 북쪽을 지키며 겨울을 관장하는 암컷 거북과 수컷 뱀이 한 몸인 현무(玄武), 나무의 속성을 지니고 동쪽을 지키며 봄을 관장하는 청룡(靑龍)과 더불어 신격화 된 현존하는 동물 백호. 그는 전설이자 현실로 몇가지 잠언을 전한다.

신화 속의 호랑이는 곰과는 달리 사람이 되기를 포기했다. 쑥과 마늘 만을 먹으면서 정해진 기일을 견디지 못한 탓이다.

이는 단지 실패의 한 장면에 그치지 않는다. 잡식 동물인 곰은 쑥과 마늘을 소화 할 수 있었지만, 육식동물인 호랑이에게는 생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호랑이가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한 것은 하지 못할 일이 있다는 자각에서 기인하며, 자신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불합리한 조건에 대한 저항이다. 

호랑이의 정체성은 자족하는 야성인 셈이다. 굶어서 죽을 지언정 먹지 말아야 할 것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기개의 표상이다. 스스로 몸을 움직여 음식을 구하고, 토끼를 잡을 때도 맹수를 상대하듯 최선을 다하는 치열한 목숨이다.

모름지기 다가올 지방선거에 피선거권자로 나서는 사람이라면 호랑이의 신념을 지표로 삼아볼만 하다.

호랑이의 성실성과 부당한 것에 대한 저항 정신은, 정치인 뿐만 아니라 경인년 한 해를 시작하는 공무원들이나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한 번 쯤 호흡을 멈추고 새겨볼 덕목이다.

현실에서 호랑이는 절정에 이른 완급 조절자다. 느리게 움직여 적에게 노출되지 않고 사정거리에 들어 온 목표물을 향한 날랜 몸놀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것을 위해서 끊임없이 몸을 단련하고 빼어난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당당한 자신감에서 발산하는 늠름한 기품은, 준비와 타이밍의 중요성을 웅변한다.

호랑이는 기회를 얻기 위해 최대한 숨을 죽이고 결단을 내려야 할 때 망설이지 않는 감각을 타고났다. 판단은 신중하지만 행동은 단호하다.

호랑이의 용맹은 인내와 지혜로 더 빛나며 그것이 산중(山中)의 동물세계를 압도한다. 우리 조상들이 호랑이의 그림 조차 호신부로 여겼던 것은 사신(四神) 중 하나이기에 앞서 그런 현실적인 탄력과 균형의 소유자임을 엿 본 결과로 여겨진다.

무릇 권력을 지닌자가 탄력과 균형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불협화음과 부조화를 최소화 하고 생동감있는 공동체를 이끌 수 있다. 작위적일 필요가 없다. 저절로 되는 일이다.      

탄력과 균형의 전령

호랑이는 우리 곁에 야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 갖혀 있는 호랑이는 더이상 목숨을 위협하는 포악한 맹수는 아니다. 이렇게 박제된 야생 속의 호랑이는 오히려 우리의 상상을 무한한 공간에 풀어놓는 역설이 된다.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예의 바른 동물이고, 효성이 지극하며, 의로운 사람을 도울 뿐만 아니라 사악한 잡귀들을 물리치는 영물이 바로 호랑이다. 

하지만 이런 신통력을 지닌 호랑이도 우리 기억 속에서는 힘없는 동물들에게 골탕을 먹는 어리석은 동물이기도 하다. 공포의 대상을 희화화 함으로써 공존을 가능케 하는 심리적 완충 작용의 결과다.

어린 시절 우리의 상상을 가장 많이 자극했던 호랑이는 언제 부턴가 또다른 우리다. 더불어 살기 위한 황금율의 본보기이고 공생에 필요한 것들을 지켜내며, 사랑하면서 고통을 나누는 우리다.

천변만화의 풍부한 표정으로 우리의 잠재의식에까지 영향을 주는 켜켜이 쌓인 호랑이의 기억은 결국, 우리에 대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바람이다.

강하면서 어리석은 호랑이에 대한 그 분들의 재해석은, 항상 이길 수만은 없으며 지더라도 수용할 줄 아는 유연성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닌가 한다.

살생을 생명연장의 수단으로 삼는 맹수가 현존하지 않는 다른 신들과 더불어 하나의 방위에서 우리를 지키는 수호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성악설 보다는 성선설에 가까웠던 그 분들의 뜻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한다.

용서와 기다림, 나눔이 곧 삶이었던 그 분들의 현신이 곧 호랑이이며, 우리는 그 차고 넘치는 호랑이의 후예들일 법 하다.

우리에게 경인년 백호가 친숙한 것은 그 분들의 전령인 때문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