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외부세계는 '분노'로 들끓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냉소로 가득하다. 온도와 압력이 높아진다는 건 위기다. 하지만 임계점 너머의 변화가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에서 기회다.

더구나 저항은 참여의 원동력이다. 잘못된 정치를 바꾸는 힘이다. 그러나 우리는 2011년 10월 26일 침잠(沈潛)한 자화상을 목도한다.

익산 제4선거구 도의원 보궐선거 투표율은 18%에도 미치지 못했다. 남원이 56.2%  순창이 71.4%의 투표율을 보인 것을 감안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정치의 현주소다.

정치를 냉소의 대상으로 삼는 풍조는 독선과 교만의 발로다. 썩은 정치는 후진적 표징이고, 협잡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자신과 상관 없다는 식의 왜곡된 자만심이다.

누가 대신 해주지 않는 노동에 땀을 흘리며 경쟁하는 것 만이 고귀한 삶이라 여긴다. 그러나 이렇게 경쟁에 길들여진다는 것은 불균형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부조리를 고치겠다는 생각이 없으면, 부조리한 구조의 한 구성원이 될 수밖에 없다. 최소한 암묵적 동조를 피하지 못한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지 않는 탓에 현실을 비판하는 촉수도 퇴화한다.

폭력에 굴복하고, 빼앗겨도 포기하고, 가진게 남보다 적은 탓을 오직 개인에게 돌린다. 누구든지 이런 정체된 삶을 성찰하는 길목에 이르렀을 때 필경 자신에 대한 냉소를 만나게 될 것이다.

심장이 뛰지 않는, 분노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차디차고 무기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93세 노인 스테판 에셀이 "분노하라"고 목놓아 외친 것은 잘못 돌아가고 있는 세상의 그런 근원적인 결핍을 향해서였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연대의 뜨거운 열정을 되살려야 한다고 호소한 그의 육성은 전세계를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양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냉소'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삽시간에 확산됐고, 다양한 평화적 봉기로 이어졌다.

자의와 타의로 억압되었던, 더이상 견딜 수 없다는 공감이 이토록 큰 반향의 시사점이다. 독일의 프랑스 강점기에 레지스탕스 투사였던 에셀에게 저항의 기본 동기는 보이는 적에 대한 분노였다.

하지만 그의 어법에 따르면, 오늘날 적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식어버린 우리는 분노의 표적을 잃은 채 부당한 증오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참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잘 바라보고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분노하는 것과 그 결과로 이어지는 '참여'가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라고 했다. '무관심이 가장 나쁜 태도'라는 그의 육성이 광장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에셀이 던진 화두가 이 세계에 만연한 환부에 적중했다는 점이다.

34쪽짜리 소책자가 출간 7개월만에 2백만부를 돌파한 것은 숫자에 불과하다. 노옹 에셀이 젊은이들에게 일갈한 '무관심에서 벗어나 분노할 의무'는 지구 반대편에서도 수없이 복제되어 작동하고 있다.

사회 양극화, 차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금권 등에 대한 젊은이들의 저항이 행동으로 옮겨졌다.

온라인에서 그리고 오프라인에서 정치와 시장권력의 오만과 횡포, 불법과 탈법을 감시하자는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다.

그러나 익산시민들은 정치에 대해 최악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거대한 분노의 모퉁이에 이토록 건재한 ‘냉소’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이 나라를 뒤덮고 있는 악성지표들과 무관한 도시여서가 아니다.

비정규직 비율 세계 최고 수준, 극심한 청년실업, 출산율 급감, 고령화속도 세계 1위, 소득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의 주택가격, 경제력 대비 지나치게 높은 생활물가 등에 따른 고통은 시시각각 서민들을 조여들고 있다.

냉소의 이면은 좌절이다. 낡은 기득권세력과 타협하고 굴종하는 기제다.  나아가 평소 주변에 무관심했던 탓에 판단과 선택의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이런 냉소적 태도는 불행하게도 일상에서 주변의 '열정'을 식힌다. 또, '참여'를 오손(汚損)하는 퇴행적 기제다.   

우리가 사회의 한 구성원인 이상,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미래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실행해 나가는 이유다.

그래서 가장 불행한 것은 이런 신념의 끈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냉소주의의 시작이다. 여기에 자기가 경험한 세상을 너무 높게 평가하거나 타인의 행위를 무시하는 권위주의가 바탕으로 깔리면 '독선'이 자리를 잡게 된다.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언어 '저항'

불신과 냉소 앞에 섰을 때 성인군자들 조차 인간적인 고뇌와 좌절을 맛보며 힘겨워 했다. 냉소는 그렇게 지극히 반사회적인 속성을 지닌다.

그 시작은 불신이었다. 정당과 정치인들이 원인이다. 그러나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고, 잘못 된 것을 바꾸려면 사람을 바꿔야 한다. 그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내버려두는 것은 잘못된 정당과 정치인에게 최적의 환경을 보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신자유주의적 언어를 통해 현실을 냉소하는 것이 아닌 사회적 언어를 통한 저항이 들불처럼 번지는 지점에 서있다.

불합리를 견뎌내고 더러워도 참고 이겨내야 달콤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낡은 '신화'는 버려야 할 때다.

내가 뭘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냉소, 그것은 개인의 삶조차 마비시키는 절망의 독소다.

누가 어떻게 다른지는 관심이 없고, 모두가 사기꾼이며 어떤 선택도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염세주의적 자승자박은 막다른 길이다.

동시대의 시장과 정치, 그리고 문화는 공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사회적 연대 없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먹고 배설하며 늙어가는 것 뿐이다.

지금 누군가가 한 껏 냉소할 수 있는 자유 조차도 냉소하지 않았던 누군가의 지난날 희생으로 주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