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지청소년사회교육원 익산키퍼트리 이사장 이 강래

봄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지만, 가을을 기다리는 사람도 퍽 많습니다. 가을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도, 초가을의 산들바람에 넋을 잃는 이가 있는가하면, 늦가을의 스산한 거리를 헤매며 애써 우수에 젖어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름의 무더위를 씻어내는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은 상큼하기 그지없습니다. 계절의 순환이 가져다주는 변화의 긴장감도 초가을에 훨씬 두드러집니다. 그래서 젊은 연인들의 가슴은 첫 낙엽이 질 때부터 벌써 가을을 앓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빛깔을 다 풀어헤친 듯 무르익을 대로 익은 단풍철도 아직은 가을의 절정은 아니 올시다. 가을의 멋에 흠뻑 취하려면 아무래도 늦가을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떨어져 쌓였다가 이리저리 흩어져 나뒹구는 낙엽들을 초겨울의 문턱까지 바짝 몰아가는 쌀쌀한 바람결이라야 가을의 깊은 맛을 제대로 우려냅니다. 찬란했던 단풍들이 볼품없이 탈색 되어갈 무렵, 이제 겨울인가 싶어질 때, 그제야 비로소 상념은 나래를 펴고 가을은 릴케의 가을날처럼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

가을이 깊어지면 젊은 가슴은 촉촉한 감상에 젖어들고, 나이든 머리엔 명상의 주름이 짙게 패입니다. 그래요. 가을은 모순의 계절이지요. 풍성한 수확의 기쁨도 잠시, 가을걷이가 끝나 휑한 들녘엔 이삭 잘라낸 볏자락 더미만 남아 성취의 덧없음을 우울하게 말해줍니다. 나무들은 무성했던 잎을 다 떨어뜨리고 여윈 가지 끝에 힘겨운 세월을 겨우 매달고 있지만, 사위어 가는 줄기 속엔 생명의 씨앗을 소중히 품고 있습니다. 매번 가을은 성취와 허탈, 쇠락과 부활의 갈등으로 신음하는 중입니다.

가을은 온통 모순투성이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던 영혼도 종내는 홀로 남겨져 신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김현승은 “가을에는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호올로 있게 하소서”라고 가을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신경림은 갈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 그는 몰랐다.”

가을이 가을인 것은 서늘한 바람 때문만은 아닙니다. ‘푸른 아우라의 달빛’ 때문도 아닙니다. 가을이 가을인 것은 오로지 갈대 때문입니다. 갈대의 흔들림 때문입니다. 가을이기에 갈대가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갈대가 흔들리기에 가을입니다.
가벼운 바람결에도 온 몸을 흔들어대는 갈대의 몸짓에서 고요한 울음을, 살아있는 것들의 눈물을, 산다는 것의 의미를 낚아채는 시심은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어째서 바람을 탓하지 않는가. 어째서 달빛을 꾸짖지 않는가. 어째서 갈대의 조용한 울음만을 나무라는가. 산다는 것의 의미를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는 것’으로 밖에는 알지 못하는 시혼이 너무도 측은해서 야속하기까지 합니다.

늦가을 어느 깊은 밤,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는 내 몸짓에 문득 놀랍니다. 갈대숲을 거니는 연인들이 사랑에 한껏 취해있을 때, 나는 갈대처럼 울었습니다. 까맣게 몰랐던 갈대의 흔들림을, 그 흔들림의 비밀을 알아챈 나는 속으로 조용히 흐느낄 수밖에 없었어요. 울음으로 스스로를 흔들면서, 그렇게 속으로 고요히 울면서, 산다는 것의 의미를 곱씹습니다.

지금은 며칠 진한 추위와 눈으로 갑자기 모두들 독립군 복장을 하고 있군요.
백설부를 이야기 한 시인도 있지만, ‘눈이 내리는 날은 벌써 겨울이 아니다’라고 읊조릴 정도로 눈은 가을의 갈대처럼 겨울의 심벌이면서도 따뜻함을 안고 있네요.

요 며칠 가을을 급습한 하얀 눈은 성취의 덧없음을 우울하게 말해줍니다.
이번에도 겨울이 가고 스프링처럼 봄이 올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