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익현한의원장 , 익산맨발대학추진위원장

강익현

'X-레이, MRI로 질병의 정확한 본질을 알고 치료를 해야죠' 아마 많은 사람이 동의하며 끄덕일 것입니다. 그러나 순간의 포착으로는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 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19세기를 살았던 '현대 미술의 아버지' 세잔느입니다.
폴 세잔느는 19세기 후반 파리에서 활동한 화가인데 피사로,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마네 등 우리 눈과 귀에 익숙한 인상파 거장들과 초기에 함께 했었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은 자연, 빛, 색채의 순간적인 변화를 포착하여 화폭에 담았습니다. 이는 고전주의 그림의 주제인 역사적 사건, 신화, 종교적인 것들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장면을 생생하고 즉흥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즉 망막에 비친 대로 그린다는 것입니다.
소위 ‘망막 주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잔느가 보기에는 이런 인상주의자들의 그림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사물의 본질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세잔느의 문제의식은 과연 이렇게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사물의 본질을 그리는 것인가? 라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요즈음의 비근한 예로 설명하자면 정치인들 명함의 웃는 얼굴, 즉 사진을 찍는 그 순간의 웃음이 ‘그 사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고,
X-레이, MRI를 촬영한 그 순간의 사진을 가지고 ‘질병의 본질’을 파악했다고 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잔느는 ‘제대로 된 화가라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서는 안 된다. 자기 머릿속에 새롭게 구성된 사물을 그려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화가의 주관이 많이 개입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것이 아주 놀라운 관점의 변화였는데, 여기서 바로 현대 미술이 출발합니다. 사실 현대 미술의 여러 사조가 모두 이 지점에서 갈라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가 생각한 것은 ‘사물 안에 내재 되어 있는 무한한 성격과 본질을 찾아 표현해야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진료실로 옮기면 ‘치료를 담당하는 사람은 X-레이, MRI, 각종 검사 결과대로 치료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근거로 질병의 본질을 머릿속에서 찾아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세잔느는 여기서 혁명적인 관점의 변화를 생각합니다.
첫째, 어떤 대상을 그릴 때 화폭에 최대한 많은 사람의 시점, 즉 여러 각도에서 본 사물을 한 작품에 그려 넣을 수 있다면 조금 더 사물의 본질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마치 X-레이, MRI를 여러 각도에서 촬영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일상에서도 우리가 누군가를 떠올릴 때 그 사람의 정면 초상화만을 떠올리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앞모습, 뒷모습, 걷는 모습, 웃는 모습, 평소의 처신, 본인과의 관계 등 아주 다양한 이미지들을 함께 떠올립니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의 변화하는 모습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그 사람의 본질에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잔느의 이런 방법을 ‘구성주의’라고 합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사과와 오렌지’를 살펴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세잔느의 ‘사과와 오랜지’를 찾아보세요.
세잔느는 이 작품을 무려 6년에 걸쳐서 완성했다고 합니다.
이 기나긴 시간 동안 그는 시점(時點)과 각도(視點)를 달리하면서 사과와 오렌지를 관찰했습니다. 그림의 뒤쪽에 오렌지가 담긴 접시와 물병은 옆면에서 바라보는 시점(視點)이고, 그 바로 앞 사과와 접시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視點)입니다.
또 그림을 자세히 보면 사과의 색깔도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맛있게 잘 익은 빨간 사과부터 푸석해진 사과, 오래 지나서 썩기 시작한 사과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과의 색 변화까지도 세잔느는 한 화폭에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으로 사과의 본질을 모두 표현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본질에 더 가까운 사과를 그리려 했던 그의 열정을 평가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런 다 시점(多 視點)의 그림들은 ‘보이는 대로만 그린 것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하여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인데, 이런 실험은 나중에 피카소의 큐비즘(입체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는 적어도 사물의 본질에 가깝게 다가서려고 매진했던 것 같습니다.
둘째, 세잔느는 이렇게 사물의 본질을 구현하다 보니 또 하나의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모든 자연의 형태가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상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사물들이 복잡하게 보이지만 단순화시켜놓고 보면 삼각형, 사각형, 원형, 원뿔 같은 가장 기본적인 형상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진료실로 옮기면, 질병이 복잡하게 보이지만 섭취하는 음식, 대기 환경적 요인, 사고방식, 바른 자세 등 누구나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것으로 질병의 원인을 귀납시킬 수 있고, 이를 극복하는 것이 질병 치료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단순화한 도형으로 그린 작품이 ‘생트 빅투아르산’이라고 하는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셋째, 그의 그림에 또 하나의 특징이 등장합니다. ‘조화’입니다. 세잔느는 인상주의에서 출발했지만, 고전주의적인 조화로움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물들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림 속의 사물들이 상호 관계 속에서 얼마나 조화를 이루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이 사물의 색채입니다.
그리려는 사물의 본래 색도 주변환경과 어울리게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잔느는 사물의 색채도 있는 그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색도 사물들이 서로의 연관성 속에서 존재하도록 보이기 위해서 세잔은 자신이 선택한 색으로 구성합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물과 배경들은 서로 연관성 속에서 더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을 진료실로 옮기면, 질병 또한 주변의 조직세포와 독립적으로 형성되지도 않고, 전신의 상태와 분리해서 치료하는 것도 불완전한 것과 같습니다. 생활환경, 사고방식, 체질 음식, 이웃과의 관계 등을 개선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그가 원했던 ‘사물의 본질을 화폭에 담는 목표’는 후에 세분화 되어 일부는 피카소가, 일부는 마티스가, 일부는 몬드리안이 가져가 현대 미술을 풍성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본질을 찾는 그의 사고’는 미술계뿐 아니라, 질병의 진단과 치료, 정치와 정책 평가 등 모든 영역에서 또, 기계적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필터버블(Filter Bubble)과 에코챔버(Echo Chamber) 내에서 생활하는 오늘날의 삶 속에서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할 덕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