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중 범죄학박사

평생을 살면서 악기 하나는 제대로 다루고 싶었습니다.

피아노를 상상하며 나무 건반만 눌러야 했던 어린 시절을 뒤로한 채 하모니카를 열심히 불어댔던 학창 시절. 기타를 배우고자 했으나 손가락이 짧아 고전했고, 드럼을 배우고자 했으나 그 규모에 중도 포기하고 말았던 중년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결국은 고희를 넘어서 의기투합했던 친구가 아코디언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을 졸일 즈음, 한 악기를 만났습니다. 바로 대금입니다.

아시다시피 대금은 한국음악에서 널리 사용되는 관악기로 젓대라고도 합니다. 대금은 중금·소금과 더불어 삼죽이라 부르며 신라시대부터 전해오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동해에서 난 대로 저를 만들어서 부니 적병이 물러나고 물결이 가라앉았으며 질병과 가뭄이 그치므로 이 대금을 만파식적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대나무 뿌리에 입김을 불어 넣으면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대금의 소리는 호소력 강하고 흥이 나며 힘찹니다. 서양악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음색은 마치 우리 민족의 고유한 특징을 표현하고 있는 듯합니다. 대한민국에만 있는 악기, 대금. 어떤 악기일까요.

첫째, 대금은 대나무 뿌리로 만듭니다. 대나무는 원자폭탄이 터진 속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식물이라 할 정도로 생명력이 강합니다. 대금을 제작할 때 최고의 재료로 쓰이는 것은 대나무 중에서도 쌍골죽입니다. 병든 대나무라 하여 병죽이라고도 불리는 쌍골죽은 마디 양쪽에 골이 파여 있습니다.

일반 대나무와는 달리 쌍골죽은 어느 정도 크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속이 두텁게 차오릅니다. 그런 상태로 힘들게 수령을 이어갑니다. 이런 연유로 쌍골죽은 일반적인 대나무보다 속이 꽉 차 있는데 속살의 두께가 2배가량 더 두껍습니다.

그 두께만큼 상처도 깊어 쌍골죽으로 만든 대금은 희로애락의 감성을 잘 짚어냅니다. 대나무의 안쪽 벽에 바람의 흐느낌과 달빛의 애잔함까지 새겼기에 감성의 깊이가 남다르며 병들며 커 가는 아픔을 안고 자란 탓인지 애처롭고 처량한 느낌을 쌍골죽은 잘 표현합니다.

둘째, 대금에는 갈대청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갈대청은 갈대 줄기의 속을 둘러싸고 있는 얇은 막을 말합니다. 두께가 0.2mm 정도에 불과하나 대금 소리의 울림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연주 직전 여기에 입을 맞추는 연주자가 많습니다. 습도에 대단히 민감한 청에 입김을 불어 넣기 위함입니다. 연주 중에는 연주자의 숨결에 의하여 촉촉한 상태가 유지되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무대 위의 조명마저 조심해야 할 정도로 민감합니다.

청은 사람의 성대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대금에 호흡을 불어 넣으면 청이 미세하게 떨리면서 소리가 증폭되고 심금을 울리는 특유의 색채가 만들어집니다. 좋은 연주자가 좋은 청에 의한 소리를 낼 때, 이런 완벽한 합이 이루어지는 순간에는 우주가 열립니다. 이런 음악을 들을 때 우리의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리며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셋째, 대금은 사람의 입김을 불어 넣어야 소리가 납니다. 거친 입바람이 아닌 포근한 입김이 필요합니다. 따뜻한 봄바람이 대지를 깨우듯 마음을 담은 입김이 자연의 소리를 깨웁니다. 연약한 듯 강인한 대금의 소리는 잘린 대나무 뿌리에 이러한 숨결을 불어 넣기 때문에 새롭게 태어납니다.

마음으로 담은 호흡을 통하여 듣는 사람도 슬픈 느낌을 공감하면서 자신에게 쌓여 있던 슬픈 한을 풀어내려는 소리.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마음을 울린 대금 소리입니다. 사람의 목소리를 닮아 정겹고 따뜻하게 속삭이듯 그 소리가 울리는 이유는 아마도 사람의 입에 가장 가까운 악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승희 작가가 쓴 <대금 소리>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한반도의 아픔을 가장 잘 이해하는 악기가 대금이라고 확신하며 대금의 역사를 들여다보았다고 합니다. 대금 소리는 한이 담겨 있고 비극적 전쟁을 초래한 한반도의 질곡의 역사가 그대로 담긴 것이기에 그것을 풀어내지 않고는 소설을 맺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남북이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이용하는 사상적 굴레와 사람들의 말과 행동으로 빚어지는 갈등과 대립을 대금 소리를 통해서 풀고 싶은 것이 작가의 소망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렇듯 대금 소리는 일반적으로 슬프다고 하지만 실제로 대금 소리는 슬픔과 한을 풀어낼 수 있는 여운을 제공합니다. 세상의 모든 걱정을 잠재울 것만 같은 마음을 울리는 소리. 대금 소리는 마치 우주의 속삭임과도 같습니다.

좋은 계절, 대금 소리에 한껏 취해 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