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19일은 우수(雨水)다. 눈이 단비가 되어 대지를 적시고 겨우내 얼었던 얼음이 녹아 물이 많아진다는 절기다.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새싹이 날 때다. 하지만, 순환을 시작하며 설레이는 이 봄도 오늘의 시인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는 때가 있었다. 그 때, 시인에게 봄은 희망이었고 해방이며 독립이었다.

겨울은 이육사에게 강철로 된 무지개였다. 일제강점기는 깨뜨릴 수 없이 단단한 나락이었고, 희망은 그 차고 음습한 강철의 분자 속에 갇힌 또다른 절망일 뿐이었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그래서 더 절망스러운 희망은 저주스러운 꿈이었다.

좌절과 자포자기가 보편적인 사회풍조가 되고, 이는 비굴한 인간들을 양산하는 기제였다. 일신의 안위가 정의이던 그 시대에 해방과 독립을 지향하는 뜻을 꺾지 않고 버티기란, 사회적으로 철저히 배제되거나 죽거나 혹은 미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세상에서는 인지의 부조화가 일어난다. 시인 이상화에게는 봄은 왔지만, 빼앗긴 들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 비정상이 정상이 된, 혹은 희귀해진 정상이 비정상에 저항하는 그 시간과 공간에서 시인의 의식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로부터 80년이 지난 2010년의 봄이다. 닷새 뒤면 경칩(驚蟄)이 우수(雨水)로부터 하늘과 땅을 물려받아 완연한 봄의 길목에 들어설 것이다. 그러나 일부 대학교수들에게는 봄이 오지 않았다.       

전국교수노동조합과 학술단체협의회,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등 3개 단체는 최근 우수(雨水)의 절기 안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MB정부 2년 동안 무너진 인권과 민주주의 실태를 고발하는 백서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이 백서에는 노동, 시민권, 복지, 환경ㆍ건강, 언론, 교육ㆍ학문 등 6개 분야에 걸쳐 인권탄압 사례 등이 실리고, 쌍용차 파업사태, 촛불집회 탄압, 용산 참사, PD수첩 관련 재판, 시국선언 교사 징계 등 사회 현안에 대한 교수들의 의견이 담겼다.

같은 백서는  정부가 검찰권을 남용하고 노동운동을 탄압해 인권이 크게 후퇴했으며 대학 내 학문의 자유가 위축됐다고 주장한다. 또, 정부가 독단적으로 4대 강 사업 등을 추진하고 언론 길들이기에 나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붕괴 위기에 놓여있다고 강조했다.

학술회의 등은 이와 함께 정부가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면서 복지를 축소해 서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 된 결과를 이 백서에 실었다.

억압에서 해방, 독재정권에서 민주정부로 이어지는 격동의 1백년사가 물거품이 되었다는 지적이다. 활자로나 기억되는 그 혹독한 겨울이 되살아나서 영상의 기온을 회복한 오늘을 엄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수들의 백서를 들으니, 겨울에는 체감하지 못했던 한파가 이 봄에 몇 곱절 더 날선 냉기로 우리를 위축시킨다.

빙판 위에 씨를 뿌리는 것인가

지금 만나는 이 봄은 자연의 필연적인 순환이며 우리는 어느 새 지난 겨울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백서에 따르면 국민은 봄을 빼앗겼으며 봄은 강철 속에 갇혔다.

이런 인지의 부조화는 비정상이 정상으로 자리잡으면서 구축된다. 그만큼 강한 충격과 인위(人爲)가 국민에게 가해진 대가다.

이를 유지하려는 인위는 사고를 고착시킨다. 더욱 완고해지고 과격해지며 , 심지어 잔인해지고 난폭해진다. 이는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 것과 같은 속성을 지닌다.

과연, 민주주의와 자유의 회복을 부르짖어야 하는 2010년의 현실이 정상적인 일인가. 포기 할 수 없었던 더딘 봄이 왔다 여기던 어느 순간에 그 봄이 신기루였다고 믿어야 하는 현실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봄은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는 희망의 단서다.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은 것은 어쩌면, 우리의 시비를 가리는 인식 기관의 퇴화나 또는 마비 때문일 수도 있다.      

오늘 우격다짐에 취한 권력은 어떤 독을 마셨는가. 쓴 소리 속에 든 약을 감지하지 못하고, 부적절하며 부당한 현실에 저항하는 결집된 불만이 미래를 열어가는 국력이라는 점을 가리지 못한다.

가장 높이 있는 것은 낮은 것들의 채워짐이나 쌓임으로 존속할 수 있다는 순리를 읽지 못한다. 권력으로부터의 자기불만에는 침묵을, 권력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양을 구가하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그런 가까운 미래를 그려 볼 최소한의 상상력 조차 마비된 정권이다.

이 정권은 언제까지 얼어붙은 국민들의 가슴 그 빙판 위에 씨를 뿌릴 것인가. 폭압은 폭압을 부른다. 그것은 지속의 관성이다. 오늘까지 무너진 인권과 민주주의는 아직 비정상이길 거부하는 소수에게만 체감되는 정도일지 모르지만, 갈수록 확산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얼음의 두께가 두꺼워질수록 해빙기의 위험은 높아지는 법이다. 이 정권은 쉬운 방법론에서 과감하게 탈피해야 한다. 힘들고 더딘 길을 가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문제의식이 지성인들에 머무는 지금은 걷잡을 수 없는 미래를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아직 있는 때다.

최소한 국민이 자연의 순리를 질서라 여길 수 있는 국풍이 곧 국력이다. 그래서 인권과 민주주의의 수준은 정권의 정통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