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여러모로 가족을 생각하게 하는 달이다. 가정에서 사회공동체, 학교공동체에 이르기까지 겨우내 내밀한 곳에 품었던 가족의 유전자를 퍼올리는 광합성이 한창이다. 그렇게 5월 발(發) 신록에 드러난 그 생명활동은 희망이면서 거기에 불안도 뚜렷하게 내재한다. 우리의 가족은 군락을 이루려는 관성을 잃었고, 그런 유전자 지도에서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의 영역 조차 희미해져 가고 있다. 공동체들 안에서의 동맹은 있지만 가족의 유산이었던 무조건적인 희생이나 결점 없는 신뢰의 부재로 지속가능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5. 18의 어간에 선 오늘은, 30년이 지났지만 공황(恐惶)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박제화 된 자발적 결사체의 가족들도 눈에 밟힌다. 그 잔혹사에는 국민을 향해 발포한 신군부의 광기가 여전히 행간을 날뛴다. 돌아보니 그 때까지 결사체의 구성원들은 가족의 유산을 선명하게 기억했던 듯 하다. 물리적이거나 경제적인 보상이 약속된 바 없었지만 단지 불의에 결사 항전한 이들이다. 하지만 그 이후 한 세대를 지나는 동안 자신을 기꺼이 던지던 시민결사와 그 공동체적 항쟁의지는 급격하게 희박해졌다. 가족의 몰락과 개인주의의 득세에서 그 원인을 포착하는 것은 속단일까. 

아무튼, 개인주의에서 기인한 가족의 분화와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개인들의 고립화와 파편화, 사회적 유대감의 상실 등과 무관하지 않다. 5.18 피해자의 가족들이 지금껏 해원하지 못한 것 역시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를 추동할 사회적인 동력이 그렇게 고갈된 탓이다. 진정성이 담보된 가해자들의 사죄와 그들에 대한 응분의 단죄가 단행되어야만 가능한 해원이다. 하지만 가해자들의 가식에 찬 반성을 붕대 삼고, 민주적 전제(專制)에 의한 용서를 방부제 삼아 서둘러 미봉한, 생살이 돋아나지 않는 피해자 가족들의 상처다.

새롭게 대두되는 반민주적 상황에 대한 저항이 부분적이고도 산발적으로 일어나곤 하는 오늘이지만, 자발적 결사체들의 피로감은 극단적으로 누적된 상태다. 반면, 경제 권력과 정치권력의 완력은 갈수록 맹렬해지고 있는 오늘이다.     

다시, 공공의 이익을 위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결사의 원천은 다름아닌 가족이다. 가족은 지켜야 할 대상이며, 무조건적인 신뢰의 생산지다. 독일 학자 프랑크 쉬르마허의 실화집 '가족 부활이냐 몰락이냐'에서도 위기상황이 다가올수록 가족의 의미는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낸다.

1846년 11월 말, 81명의 사람들은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시에라네바다산맥의 돈너계곡의 눈보라와 지독한 날씨 속에 6개월간 갇히게 된다.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남성의 3분의 2가 사망을 한 반면 여성은 3분의 2가 생존을 했다. 흥미로운 일은 홀로 피난길에 오른 남성들은 모두 사망을 했다. 더욱 기적같은 일은 대가족 내에 존재했던 남성들 대부분과 노인, 병자, 어린아이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목숨을 부지 했다는 것이다.

가족과 함께 있었느냐, 혼자 있었느냐가 생존을 좌우한 유일한 이유였다는 점은 다른 여러 참사들에서도 거듭 확인됐다. 위기를 감지한 즉시 지켜야할 대상을 찾아나선 사람들, 가족 구성원 모두 자신이 절대 버림받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그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그런 신성한 가족의 시대는 위기를 맞고 있다. 우리의 보편화된 핵가족화는 개인의 가치에 전도되었고 가족은 해체 일로에 있다.

"사람들은 가족, 친구, 이웃, 공동체, 노인과 어린이의 모습을 한 사회 조직 형태를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식량과 옷, 집은 물론 휴식, 오락, 안전, 노인과 어린이, 병자, 장애인의 보호까지도 시장을 통해 해결한다. 이제 곧 사회의 물질 및 서비스 욕구는 물론 인생 사이클의 모든 감성적 현상들까지도 시장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 지난 1974년 미국 사회주의 계열의 역사가 해리 브레이버맨이 예언한 우리의 암울한 미래다.

혁신과 재생산의 원초적인 힘

과거 우리의 가족이 무한하게 생산해냈던 맹목적인 신뢰와 이타심, 무욕(無慾), 결속력 같은 것은, 이제 우리가 돈을 주고 구입해야 할 가치라는 게 저자의 예언이다.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는 그의 진단을 몸소 느끼고 있다.

우리의 아이들은 걸음마를 시작하는 순간의 희열을 도우미와 함께하고，노인들은 마지막을 맞이 할 순간에 낯 모르는 호스피스 손을 잡는 풍경이다. 존폐위기에 내몰린 가족을 복원해야 할 이유다.

가족이 몰락하면서 우리 사회는 어쩔 수 없이 새롭고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혈연 관계로 묶여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여러 단계의 계약 관계로 얽혀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에서 공동의 선을 이끌어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동맹관계는 가족이라는 동력이 있을 때 더 큰 빛을 발한다. 그레이슨이 설파한 바와 같이 가족은 노동과 사랑이 만들어낸, 모든 선과 악으로 이루어진 원초적인 힘이다. 수천 년을 이어오면서 혁신과 재생산을 거듭해온 원초적인 힘이다. 공동체를 가장 깊은 내면에서 결속시킬 수 있는 동력은 역시 가족이다.
쉬르마허에 따르면, 가족이란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약자를 향한 이타적(利他的) 양보와 무조건적 배려가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공동체다. 그런 만큼 오늘날과 같은 황금만능주의 사회에서는 약자 보호를 주요 기능으로 하는 공동체로서의 가족을 유지해가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 같이 환금성(換金性)과 무관한 공동체로서 가족의 가치를 상실할 때，결국 우리 모두가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이 천문학으로 증가할 것이란 사실이 엄연하다. 만류귀종(萬流歸宗), 천하의 수많은 갈래는 결국 하나로 갈음된다. 그 하나는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