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일제(日帝) 36년의 먹장구름이 걷히고 조국이 빛을 되찾은 지 예순다섯해를 맞이했다. 어제는, 한 세대 이상을 동토(凍土) 아래 묻혔던 일백사십사개의 계절이 한꺼번에 지각을 뚫고 터져 나오던 그 날 이었다. 그러나 잠시 뿐, 과도하게 들뜬 희열은 불행의 서막이었다. 분출하는 주체의식을 통제하지 못한 혼란은 불과 5년 만에 동족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는 전쟁을 촉발했고, 분단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교과서 밖에서 그와 관련된 세밀한 참혹상을 부모들로부터 듣고 자랐다. 그에 따르면 조국의 광복은 희망이었으나 동시에 절망이었다. 

"일제치하에서 우리는 지렁이 같은 존재였다"는 할아버지의 회상. 또는 운명처럼 순응하던 지렁이가 해방 이후 허물을 벗고 본래 모습을 찾을 때 까지가 더욱 비참했다는 아버지의 회고. 검붉은 흙덩이 속에서 꿈틀거리는 혹은 비게인 날 마당 곳곳에서 일정한 패턴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서 느릿느릿 기어가는 보잘 것 없고 무기력한 지렁이와 자신을, 해독이 불가능한 뜻을 좇아 대입해 보며 뒤척이던 유년의 긴 겨울 밤 들. 그런 막연한 공포가 청년의 내부에 잠재하던 어느날 윤곤강(尹崑崗)의 시(詩) 속의 지렁이를 조우하며, 얼음 조각 같은 것에 정수리를 관통 당하여 순간 소사(燒死)하는 경험에 직면해야 했다. 어쩌면 일제 강점기의 폐해는 36년이 아니라 해방 이후 지금까지 크게 달라진 게 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불쾌감은 거기에서 비롯하고 있는 것이리라.     

1948년 삼팔선을 마음하며 썼다는 윤곤강의 시에서, 지렁이는 '나면서부터 '청맹과니'이고, 눈도 코도 없는 어둠의 나그네로서, 지나간 날을 모를 뿐 아니라 닥쳐 올 앞날은 더욱 모른다. 다만 오늘만을 알고 믿을 뿐이다. 낮은 진구렁 개울 속에 선잠을 엮고/ 밤은 사람들이 버리는 더러운 쓰레기 속에/ 단 이슬을 빨아마시며 노래 부르노니/ 오직 소리 없이 고요한 밤만이/ 나의 즐거운 세월이노라/ 집도 절도 없는 나는야/ 남들이 좋다는 햇볕이 싫어/ 어둠의 나라 땅 밑에 번드시 누워/ 흙물 달게 빨고 마시다가/ 비오는 날이면 땅위에 기어나와/ 갈 곳도 없는 길을 헤매노니/ 어느 거친 발길에 채이고 밟혀/ 몸이 으스러지고 두 도막에 잘려도/ 붉은 피 흘리며 흘리며 나는야/ 아프고 저린 가슴을 뒤틀며 사노라    

윤곤강의 시에서 지렁이는 '꿈틀'하는 본능적 저항의지도 없는 지극히 수동적인 존재다. 외부의 거센 힘에 의해 몸이 두 조각으로 잘려도 붉은 피를 흘리지만 죽지도 않은 채 아프고 저린 가슴을 뒤틀며 살 수 밖에 없다. 시인에게 지렁이는 삼팔선이며, 남북에 대치한 우리 자신 아닌가. 여전히 지렁이 신세를 탈피하지 못했으면서도, 자주국방을 위해 남북이 자주적으로 대화하지 못하는 처지에 자주국방을 외치는 허무맹랑한 꼴이 아닌가. 대한독립의 날에 분단의 현실을 먼저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새롭게 재편된 문화와 선린우호적 장치 위에 우리 민족의 정기가 설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폭력적 수단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도 점령당할 수 있고, 지렁이 꼴에 떨어진다는 것, 혹은 그것이 우리의 현실일 수 있다는 경종(警鐘)이 필요한 오늘이다. 일본패망 직후 미국과 소련은 일본군 소탕을 이유로 38도선을 그었다. 이 때 몇몇 사리사욕에 눈 먼 자들은 조국을 담보하여 분열과 반목을 책동, 남과 북은 낯선 이민족(異民族)에게 이후 5년 동안의 신탁통치 구실을 안겨 주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우리는 곧장 미.소의 분점 정국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 짧은 오류로 우리는 반세기를 넘기며 분단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무경험자로서 가족끼리 서로 총뿌리를 겨누고 밤낮으로 대치하는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다만, 분단의 장기화로 민족의 동질성이 훼손되어 남북간의 간극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는 현실 앞에서 그 극명한 현주소와 원인을 부정 할 수 없다. 우리는 해방 이후 65년 동안 민족 내부의 자주적인 독립 역량과 통일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한 세대에 걸친 민족말살 정책을 그 원인으로 인식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

이렇게 우리의 평화는 언제든지 타력에 유린 될 수 있는 긴장 상태에 놓여 있는 데도, 독자적으로 전쟁 억지력을 갖추지 않았으면서도, 포성과 포화를 앞세운 무력시위는 무슨 배짱인가. 미국이 우리의 우방이고 북한의 배후가 중국이라 한 들 전쟁은 결국 우리의 문제다. 쿵쾅쿵쾅 후회 할 겨를도 없이 단 시간에 끝나버릴 전쟁이다.

해방과 분단, 전쟁은 결국 우리의 문제

북한은 지난 9일 오후 세차례에 걸쳐 백령도.연평도 인근 서해 해상 북방한계선을 향해 사거리 27km의 해안포 130여발을 쏘았다. 지난 5일부터 이날까지 닷새 동안 진행된 우리 군의 서해 합동 기동훈련에 대응한 것으로, 북한은 이에 앞선 지난 3일 우리 군의 훈련계획에 대해 '전선서부지구사령부'의 통고문을 통해 "강력한 물리적 대응타격으로 진압할 것"이라고 경고 했었다. 우리 군은 이를 도발로 규정하고 즉각대응태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지난 3월 26일 이후 천안함 침몰 이후 서부전선에는 심상치 않은 전운이 감돌고 있다.

무력 대응 말고 달리 해볼 것이 없는 막바지에까지 간 관계다. 억울하다. 최근 수년 동안 우리들 자의에 의하여 대화 다운 대화 한 번 해본 적이 없지 않은가. 무엇이 대치 사황을 이 지경에 까지 몰아갔는가. 패권주의를 기치로 내건 미국의 명제에 휘말려 우리의 명제를 망실(亡失)한 결과가 아닐까. 피차 지렁이의 신세를 탈피하지 못한 이 겨례는 자기기만에 빠졌다. 단지, 존재감의 확인을 위해 민족의 공멸을 담보하는 허장성세만 늘어가는 꼴이다.

주체사관을 국가의 동력으로 삼는 북한은 필연적으로 폐쇄일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궁핍을 감수해야 하는 오늘에 이르렀다. 벼랑 끝 전술 말고 달리 구사 할 것이 없고, 미국의 고립시키는 조처들에 장기적으로 대처할 만한 여력도 없다. 궁지에 몰리면 타격을 가하고 자폭하겠다는 위협이 아닌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다. 그에 반해 남한은 조급하게 통일을 밀어붙여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상생을 위한 경제협력과 가능한 선에서의 고통분담으로 형제애를 재확인 할 수 있다. 나눔으로 시간을 벌고 인내를 통일전략으로 삼는다면 이데올로기 때문에 동토가 된 북한의 하늘에 빛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통일정책은 미국의 조바심에 장악되었다. 국제사회의 질서로 군림하려는 미국은 북한에 의해 깎인 체면에 안달하는 꼴이고 우리 정부는 그 장단에 춤을 추고 있다.

같은 불이 되어서는 삽시간에 다 태우고 만다. 수승화강(水升火降)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