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우리는 '혁명'을 사전적 의미 밖에서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모호한 질문인 줄 안다. 하지만 우리의 어법은 '혁명'을 비표준화한 지 오래다. 너무 많은 경우에 막연하고도 쉽게 쓴다. 혁명이 지닌 본래 의미는 '파괴와 창건을 단숨에 이루는 것'이다. 그 속성은 단호하고도 급진적이다. 차가운 죽음과 뜨거운 탄생이 한꺼번에 교차하되, 죽음은 마땅했으며 탄생은 정당한 새 질서다.

혁명은 이전의 지배를 굴복시켜야 하기에 실패할 경우 주도한 자가 철저하게 파괴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또 기존의 관습이나 제도 또는 방식이 하루 아침에 축적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를 짧은 시간 안에 무너뜨리고 그 위에 새로운 제도와 방식을 구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혁명가는 불가능에 뛰어들어 사투를 벌이는 사람이다. 무너진 잔해 위에 살아 남아서도 강고하게 새로운 세상을 펼쳐보이는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은 자기를 먼저 세워야 가능하다. 새로운 세상을 제시할 지표가 확고해야 한다. 내부에 고열을 일으켜 사선을 넘나들며 자신의 신념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들을 불태워야 한다. 차가운 이성일 때만 파괴할 수 있고, 뜨거운 열정 없이 새롭게 세울 수 없다. 그것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공감을 얻지 못한다. 확신이 없으면 자멸은 물론이고 사회적 혼란의 기폭제가 된다.

최근 손학규 신드롬 어간에 그런 '혁명'을 수식으로 단 탄성들이 쏟아지고 있다. 혁명적 투표율, 혁명적 역전, 혁명적 정치역정, 소통 혁명.. 의외의 결과는 이렇게 혁명의 성찬을 차렸다. 그동안 정치 참여에 냉소적이던 청장년층이 대거 투표장에 몰렸고, 이는 양적 질적으로 팽창한 트위터 소통의 결과였다.

손학규는 과거 청년시절 험난한 지형에서 학생운동가, 노동운동가, 인권운동가의 족적을 남겼다. 서울대 재학시절, 한일협정 반대투쟁 이후 이어진 삼성그룹 부정 규탄시위 과정에서 당한 두차례의 무기정학, 함백탄광 광부 노동자 생활, 졸업후 구로공단 노동운동, 노동자와 빈민의 본래적 인권회복운동을 벌이던 중의 옥살이. 유신독재시절의 도망자 생활, 거듭되는 사직당국의 연행과 공안당국의 죽일 장적을 한 꼬박 이틀간의 구타.        

실로 가슴시린 노정이다. 그는 80년 서울의 봄도 함께 누리기를 거부하고 유학길에 올랐다가 돌아와서는 부천서의 권양 성고문 사건에 관한 보고서를 내고 민주화와 인권운동을 재개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88년부터 93년까지 인하대와 서강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진보적 소장파로 명성을 떨쳤다. 이렇게 그의 정체성은 '진보'로 함축되었다.

하지만 그는 93년 당시 평민당을 고립시키기 위한 '보수'연합의 산물인 거대 여당 민자당(한나라당의 전신)에 입당해 눈부신 성공가도를 달렸다. 14대 총선 보궐선거에 이어 15대 재선에 성공한 그는 보건복지부장관을 역임했고, 16대 총선에 당선되어 3선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2003년에는 경기도지사가 되었다. 10여년 넘는 정치사에서 그는 패배를 몰랐다.

그러나 그는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의 정치적 신념은 당내에서 작동하지 않았으며, 바뀌지 않은 한나라당에는 더이상 설 곳이 없게 되었다. 한나라당과 결별하고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당적을 옮긴 그가, 대선후보 경선에서 정동영에게 패한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창당한 통합민주당의 대표가 되어 18대 총선을 이끌었으나 참패한 것도 그가 자신을 재건하지 못한 결과다.

같은 해 칩거에 들면서 반성의 시간을 갖겠다던 그는, 자신이 10여년 온실에서 야생성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나 고민은 했을까. 불가능에 도전하는 그 자체에 가치를 두었던 손학규만의 지표 대신, 이기는 쪽에 서기 위해 안전한 길 찾기에 연연했던, 포용과 융화의 미명 아래 집단의 울타리 안에 안주했던 자신을 성찰했을까. 지난해 8월 정계에 복귀한 그가 다시 민주당 대표가 되어 보편적 복지 노선을 표방한 민주대장정은 도전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자기 정련(精鍊)의 결과였을까.

4.27 재보선. 손학규는 전통적 한나라당 텃밭인 경기 성남 분당(을)에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제1야당 대표로서 정권심판의 의미를 부여하며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결연한 의지로 선거에 임했다.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또다시 승리의 신화를 썼다.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던 여건을 딛고 역전승을 올린 후폭풍은 한나라당에 쓰나미를 몰고 올까. 천당 아래 '분당발' 손학규 효과는 내년 19대 총선 이후 여의도에 민주당 지배구조의 프레임이 될까. 분당의 유권자들은 자기혁명을 이룬 손학규를 선택한 것일까. 불공정한 정권이 내건 공정사회 기치에 질려버린 민심이반의 분출은 아닐까. 사실 손학규는 이번 분당(을) 선거에서 패하더라도 한나라당 지역이라는 점 덕에 당초부터 부담은 없었다. 여러 위험요인이 상존하여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기 때문에 '당을 위한 희생적 차원의 결단'이라는 살신성인의 정신이 부각되어 패배의 책임은 상쇄 될 수 있었다.

결단으로 한 길을 택하라

반면, 승리 할 경우 당내 대권주자로서의 위상이 확고해질 것은 물론이고, 대중적 지지를 배가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적어도 수도권에서의 지지율을 수직상승 시킬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더 크게 보였다. 오히려 그가 적임자로 거론된 이후 좌고우면하다가 당내에서 흔들기 때문에 출마한 것으로 비쳐진 것이 문제다. 이는 향후 대중의 지지율 유지 또는 제고와 당내 입지 구축에 부정적인 면이다.       

손학규는 궁극적으로 대선주자다. 이번 분당 보궐선거는 처음부터 밑져야 본전이고 잘되면 대박이 예정된 게임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정적인 면을 지나치게 걱정한 나머지 결단을 앞두고 미적거리는 태도를 보였다. 승리 이후 그를 둘러싼 '혁명'이라는 수식이 부적절한 이유다. 거슬러 올라가 그의 정치역정은 송두리째 혁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거 이후 나타난 지지율 상승은 거품일 수 밖에 없다. '정권교체' 또는 '여야의 역전'은 아무래도 혁명과 가깝다.      

결단으로 한 길을 택하고 신념으로 그것을 밀고 나가지 않고 공감을 얻기 어렵다. 손학규의 혁명은 손학규 정치일생 전부를 무너뜨리는 데서 비로소 시작 될 수 있다. 그 위에 어디에서든 생존할 수 있었던 그의 청년기 잡초같은 마인드가 복원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