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영화 '도가니'는 개봉 5일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고 밀리언 행진이 가파르게 계속되고 있다. 흥행의 중심에는 클로즈업 된 '사실'이 있다. 감독은 극의 구성이나 전개하는 방식면에서 다소 성급하게 덜컹거리며 어눌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이게도 픽션의 공간에 논픽션을 대체하는데 성공한 대목인가 싶었다.

영화 '도가니'는 관객들이 실화의 사건 현장에서 같이 호흡 할 수밖에 없는 틀을 구축했다. 영화의 극적 재미를 느낄 겨를이 없다. 믿기 힘든 괴물들의 실재에 경악하고, '왜곡된 자유, 평등, 정의의 거친 주먹'에 난타당한다. 자주 눈을 감아버리는 카메라의 시선은, 불편한 진실을 망각하고 싶어하는 관객들의 창이었다.

이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안개와 팔짱을 낀 구경꾼들이다. 현장인 청각장애인 학교는 초행길에 왠만해선 찾아가기 힘든 안개 자욱한 외딴곳에 자리잡고 있다.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환경은 그만큼 예측할 수 없는 돌발변수들을 안고있는 법. 방문객은 매순간 그 변수 앞에서 선택해야 한다. 피할 것이냐 맞설 것이냐.

하지만 어떤 것을 선택하든지 피해자는 발생한다. 이때 자신이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영화 '도가니'는 그 딜레마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학교 선생으로 부임한 주인공(인호)이 불쑥 달려드는 헤드라이트를 피하려고 핸들을 꺾었다가 도로를 횡단하던 고라니를 들이받아 죽이는 것 처럼, 칠흑 속에서 노리고있던 독사는 낯선 상대의 움직임이 감지되면 망설임없이 물어버린다.

족벌체제로 운영되는 청각장애인 학원, 그곳은 변태성욕자들의 도가니였다. 침묵의 카르텔은 광기의 온상이었다. 영화는 차마 볼 수 없는 장면들을 재단하여 사건을 축소 했지만, 실제는 선생 대부분이 여러 장애아들의 몸과 마음을 짐승 대하듯 유린했다. 그들은 학원권력 상층부의 범죄에 대한 침묵을 넘어 적극적으로 공범이 된 것이다.

그들의 공존을 위한 대처법은 그들 사이에 돈독한 신뢰를 쌓았고, 자발적인 은폐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들은 스스로 점령군이 되어 문명 이전 야만의 상태로 떨어졌다. 어린아이에 대한 폭력과 추행, 강간의 희열에 도취된 그들은 그걸 그들만의 축제로 일상화 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안개, 독사는 그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선생님의 상습적이고 무자비한 구타와 뒤틀린 성욕에 노출되어 있던 민수는 이 학교에서 처음으로 독사에 물렸다. 일곱살난 동생이 철마에 치어 산산이 부서진 걸 목도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이 민수가 보는 앞에서 동생을 성추행한 그날 밤의 일이었다.

민수가 동생과 다른 여자아이들의 피해사실을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이 무르고 약한 아이는 피하지 못할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 것이다. 가슴에서 들끓던 분노와 그 고통의 눈을 통해서, 더이상 체념하고 익숙해 질 수 없는 골리앗에 온 몸을 던져 얻어질 안식의 길을 보았다.

감독은, 민수가 용서하지 못하는 세상과, 합의하지 못할 것도 없는 세상이 뒤섞인 불편한 진실 한 가운데 섰던 것일까. 민수로 하여금 죽음을 선택하게 한 공권력은 엄연한 야생의 법칙. 경쟁에 길들여진 우리는 민수의 눈을 통해서 부조리한 현실을 세상의 불가피한 작용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각성한다.    

인호가 이 학교에 부임해 만난 민수는 저항이 살아있는 이유가 된 주체였다. 유년기부터 성폭력에 노출된 여자아이들과 함께 학교밖(무진시)으로 뛰쳐나가지만, '고발'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댓가를 감당하는 나약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존재다.

인호에 의해 이 사건은 학교 밖으로 나왔지만, 무진시(세상)는 이들에게 더 큰 좌절을 안겨 줬다. 심판대에 오른 괴물들을 둘러싼 사학재단과 경찰, 검사, 재판부, 변호사, 교회는 진실을 조직적으로 왜곡하고 조작하는 보다 짙은 안개였다. 이 안개는 '모든 것을 포기해도 기층의 부조리를 고치기는 어렵다'고 웅변하는 표징이었다.

자신과 동생, 학우들을 유린하고도 자유의 몸이 되어 쾌재를 부르며 만취한 생활지도선생님, 민수로 하여금 그를 끌어 안고 철길에 뛰어들게 한 감독의 각색, 이것이야 말로 사실과 영화사이에서 드러나는 불가항력이 아닐까. .

우리가 한사코 치워버리던 불편한 진실, 언제나 다른 이들의 일일 뿐이라고 외면하던 민수와 무진시는 우리가 집중하는 삶의 열기에서 피워낸 또다른 안개다.

우리는 '무진'을 벗어날 수 있을까

사회의 최약자들을 도왔지만,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인호는 무진시를 빠져 나와 자신이 원하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는 음지의 부조리와 불합리가 빛의 일부라고 인정하는 우리를 대변한다. 무모한 투쟁을 거두고 '그들이 자신을 바꾸지 못하게 하는 선'으로 물러선 또다른 우리다.     

그의 표정에는 정의를 수호하는 자들의 거래, 경찰의 물대포와 전경들의 완력에 무너지는 인호, 공권력에 짓밟히는 민수의 영정사진, 돈 앞에 굴복하는 사람들이 오버랩된다.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물대포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성폭력대책위원회 회원들을 팔장을 낀 채 무표정하게 지켜보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무진은 빨리 벗어나 잊어버리고 싶은 곳이다. 하지만 인호는 서울의 한 지하철 역에서 마주한 '안개의 도시 무진시'를 홍보하는 와이드컬러 광고판 앞에서 무진시를 벗어났다고 생각할까. 사실 우리는 영화보다 더 많이 엉킨 무진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엄습하지 않았을까.

영화 밖에서 보니, 정부나 지자체는 문제의 학교에 40억원을 지원하고도 전혀 감시하지 않았다. 전시효과를 노린 복지 포장정책을 반증한다. 성범죄를 저지른 교사들 절반 이상이 계속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나라다.

지난달 25일 대책위가 포털사이트에 발의한 '감독기관에 요구하는 청원'이 4일만에 당초 목표 서명인 5만명을 달성하고도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말하지도 듣지도 못했던 또다른 민수들이 이렇게 많았을까. 그리하여 우리들의 눈은 권력과 법의 비호아래 변태성욕을 채우며 무한권력을 만끽하는 또다른 교장을 똑바로 보게 될 것인가. 우리의 피로감은 어느 지점에서 한계를 느낄 것인가. 야생의 법칙 아래서 살아남아야 하는 우리가 망각을 동원할 시점이 조금은 나중에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