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거래에는 공정성이 담보돼야 한다. 법과 제도가 그 실현 장치다. 개인간의 계약이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이다.

그래서 계약 당사자 일방이 신체와 정신에 결함을 안고 있는 행위무능력자일 경우 계약을 무효로 규정한다.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상태라면 그 결과도 예측하지 못한다.

계약당사자 일방이 절박하거나 억압된 상태에서 굴종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을 경우도 법이 고려하는 공정성의 지표다.

정상적인 계약행위 조차도 그 내용이 평등의 원칙이나 비례원칙에 위배되면 무효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를 택한 경우 그걸 구제해야 한다는게 우리의 법정신이다.

이것은 법이 지향하는 최고의 선(善)인 '균형'의 발현이다.

그러나 국가간 불공정한 계약을 체결 할 경우 그것을 구제해 줄 국제법이나 국제중재기관은 없다. 한미 양국이 밀어붙이고 있는 자유무역협정(한-미 FTA)은 두 나라가 평등과 비례원칙 아래 보호 받을 기준을 먼저 정하지 않았다.

아직 미숙하여 변별력이 없고, 미국을 지극히 숭배하되 그 상태를 늘 자기검열하는 우리 정부의 무모한 체질이 초래한 결과다.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개별 국가의 단위를 초월, 세계를 하나의 통합체로 만들기 위해 적지않은 시간을 투자해 왔다.

유럽 공동체나 북아메리카 자유무역 지대와 같은 지역주의나 보호 무역주의의 대두로 시련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거대자본을 가진 미국은 제국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은 '세계를 하나로'의 기치 아래 국제통화기금(IMF),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등의 국제기구들을 동원해 왔다. 

반면, 우리 정부는 1905년 11월 18일 일본에 아예 자주권(외교권)을 넘겨주는 을사늑약을 체결한 경험이 있을 뿐이다.

그 치욕의 역사가 청산되지도 않았고, 오히려 친일 보수가 패권을 쥔 나라다.

더구나 이들 권력지향의 속성은 106년 동안 친미화의 가속페달을 밟아왔다.

이 나라의 역대 외교부 장차관의 3분의 2가 미국 외교라인 출신이고, 나머지가 일본외교라인 쪽에서 나왔다는 지적이 그것을 단적으로 방증한다.

FTA 협상을 일선에서 주재하는 외교관료들이야 말로 뼛속까지 숭미(崇米) 성향의 보수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매국노들 처럼, 보수의 권력을 보전할 수 있다면 나라의 주권 따위는 그들에게 무의미하다.

하물며 이나라 권력 심장부의 방향성이 그들의 노선과 일치한다면 오죽하겠는가.

FTA를 들고 나온 미국은 처음부터 행위무능력자를 테이블 앞에 꿇어앉힌 꼴이다.

결과에는 관심 없고 어떻게든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되, 명분 만들기에만 급급한 그들에게 협상전략이 필요할 까닭이 없다.국가간 상품 이동의 자유화는 공존공영(共存共榮)을 추구한다. 

한-미 FTA를 구동시킨 명분이며 총론이다.

그 취지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쌍방이 상품의 진입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삼았던 규제와 관세 장벽을 허물어야 했다.

서로에게 배타적인 무역특혜를 어떻게 어느정도 부여할까.

쌍방이 그런 각론을 놓고 갑론을박했지만 정작 미국은 우리를 존중하지 않았다.

접점을 찾아가는 협상방식이 아니라 미국식 '균형'이 협상과정을 지배했다.

'투자자와 국가간 분쟁해결제도(ISD)'는 미국의 태도를 압축적으로 상징한다.

ISD는 미국 투자기업이 우리 정부를 상대로 직접 국제 중재기관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분쟁해결 절차다.

우리 정부의 협정의무 위반에 따른 피해를 입었을 경우인데, 미국 기업은 우리 법정에서 패소하더라도 같은 사안을 중재요청 할 수 있다.

이 나라의 국민과 기업에게는 인정되지 않는 '법원의 판결에 대한 도전'을 미국 투자자들에게는 허용하는 것이다.

협정의무의 범위는 미국 헌법이 절대적인 재산권 보상 개념으로 채택하고 있는 '간접수용'까지 포함한다.

'간접수용'은 정부의 규제로 소유권 몰수나 명의이전과 비슷한 재산상 손해가 발생했을 때 국가가 보상해야 한다는 법리다.

투기적 거래 억제, 무질서한 도시의 팽창 억제, 자연환경 보전, 공공시설 설치에 따른 사유제산권 제한, 주택분양가격 상한제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우리 헌법 23조는 개인의 재산권도 공익에 적합한 범위 내에서만 행사하도록 규정한다.

기업형 국가 미국의 정의

미국의 자본은 이 나라의 특수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며, 헌법이 부여한 공공정책 수립 권한을 박탈하려 한다.

ISD를 수용할 경우 우리 정부는 공공복리를 위한 정당한 규제가 필요할 때라도 '극히 드문 경우'인지에 대한 자기검열을 해야 한다.

미국 투자기업을 보호해 주기 위해 이 나라의 국가주권을 협상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국제중재재판소가 극단적으로 투자기업에 경도되어있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중재재판부가 고려하는 문제는 오로지 '투자에 어떠한 영향이 있는가' 이다.

미국은 최근 월가 점령시위대의 출현 이후, 자국의 상위 1% 계층의 소득이 275% 늘어난 것을 자각했다. 소득·부·정치권력의 집중 현상이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부자증세 논의가 활발하다.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다각적인 공공정책 수립을 검토하는 미국이다.

ISD가 불공정하다는 것을 미국은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청와대 정무수석은 여당의원들에게 한-미 FTA에 반대하는 것은 반미·친북행위라고 압박했다.

대검찰청은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관련해 검찰이 허위문건이라고 임의로 지정한 것을 유포하면 처벌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히고 나섰다.

미숙한 이 나라는 미국의 부당한 태도를 추궁해 균형을 잡아갈 기회를 눈 앞에서 놓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