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한달 전 갑작스런 김정일 사망은 우리사회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참으로 엉뚱하게 안철수에 대한 색깔론이 나오고, 보수 우익신문들은 김정일을 조문하거나 입에 올리는 진보단체들을 향해 '빨갱이'라며 고성을 질러댔다.

그 바람에 청와대로 향하던 디도스 공격(10.26 부정선거)의혹사건이 묻혀버렸다.

대통령의 형님 이상득 의원의 권력비리가 주목을 받다가 국민의 눈에서 멀어지고 있다. 추운 날씨에도 한미FTA 반대 집회는 계속 되고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지 않고 있다.

쏠림현상의 틈을 타고 한미 FTA는 슬그머니 발효될 조짐이다.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 만한 것은 북한 체제변화에 따른 안보문제에 관해 우리사회가 과거와 달리 상당히 성숙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김정일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한때나마 한반도에 긴장과 불안이 엄습했으나, 17년 전 김일성 사망정국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적어도, 은연 중 전쟁을 암시하는 유언비어가 확대 재생산되거나 무엇이든 준비가 필요하다는 절박한 기류는 포착되지 않았다.  일부 주요 이슈를 가리는 정도에 그쳤을 뿐이다.

지난 50년 간을 전쟁에 대비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인력을 희생시켜 온 대가다.

특히 입에 올리기 거북하지만, 일제 강점기와 6.25동란을 겪은 기성세대들의 생물학적 도태야말로 불안감을 완화시킨 주 요인이다.

기성세대들의 불안은 신세대들로선 이해 할 수 없는 밑도 끝도 없는 정서였으나, 그것은 경험에서 축적된 것이었다.

강점기에는 부당한 약탈을 겪었고, 저항하다 도륙당하는 살붙이와 주변을 목도했다. 

전쟁은 체면이나 양심, 도덕률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곳에 현실로 존재했다.

모든 것이 부서진 폐허 위에서 살아남으려면 잡초보다 모질어야 했고 나무뿌리라도 먹었다.

떠나지 못하거나 지향 없는 피난을 접고 은신처를 찾아 정착한 이들은 와중에 창궐하는 빨치산과 맞닥뜨려야 했다.

빨치산은 혈육이거나 이웃이었다. 하루 아침에 돌변한 군복을 입지 않은 후방의 북한군이었다.

전장보다 더한 동족간의 살육이 벌어졌다. 가치관의 차이가 부모와 형제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다.

전란통에 용케도 살아남은 그들 소년 소녀들은 시민혁명과 쿠데타, 군사독재와 경제 기적의 한복판을 질풍노도처럼 관통한 주역이었다.

초토 위에서 불과 40여년 만에 1인당 국민소득을 세계 34개 경제대국 가운데 26위로 끌어 올려놨다.

이런 결과를 달성하는데 영국은 200년, 미국은 150년 걸렸다. 그들은 놀라운 저력을 확인했다.
그들의 염색체는 연 1조달러(1,157조)를 넘어선 무역규모의 숫자처럼 선명하게 '성장제일주의'로 진화했다.

부문간 불균형이 고질화되고 확대일로에 있지만, 그들은 감수해야 할 발전의 그늘로 여겼다.

그들의 관점에서, 정부의 수출기업에 대한 각종 특혜 부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이로 인해 시장의 공정거래 질서가 어지러워졌고 소수 기업에 경제력이 집중돼 독과점의 폐해가 생겼으며 수출과 내수, 지역간 불균형 발전 문제가 심화됐다.

성장제일주의는 분배를 소홀히 했고, 목표달성에 급급한 나머지 부정적인 효과를 상쇄하려는 노력이 부족해 시장왜곡 같은 문제들을 일으켰다.

실업자 양산과 부(富)의 양극화는 걷잡을 수 없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기성세대의 뇌리에는 피가 튀고 뼈가 조각나는 포연 자욱한 전장이 선연하다.

기성세대는 이념이 곧 삶과 죽음을 가르고 적과 동지를 구분하며 다른 이념끼리는 결코 공존 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것은 경험에서 비롯한다.

피해의식과 위축, 살아남기 위해선 자신이 걸어온 길을 뒤따라야 한다는 신념 덩어리, 이것이 우리 보수의 정체다. 지구상 다른 나라들의 보수와 확연히 구분된다.  

불안·조급증 대물림 받은 기성 2세대

그들의 신념은 전후 수십년 동안 교과서를 지배했으며, 불안에서 비롯한 조급증이 대물림된 2세대를 창출했다.

승자 독식과 황금만능주의에서 기인한 윤리의식의 부재와 양심의 마비 같은 가치관의 상실 상태도 그대로 이전됐다.

해방 이후 67년, 6.25 동족상잔 이후 62년이 지났다.

어느덧 전후 3세대인 30~40대가 우리 세상의 중심으로 진입했고, 1세대는 변방으로 밀려난 소수가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극심한 보혁(保革)갈등을 앓고 있고, 진보를 인정하지 않는 제2세대 보수들이 권력 핵심부와 부를 장악하고 있다.

냉전에 따른 안보 문제는 더이상 보수의 무기가 될 수 없는 시간의 이동이 있었지만, 체제의 안정을 위해 냉전을 조장하고 갈등을 야기하는, 묵살을 위해 폭력행사를 정당화하는 기성세대는 엄존한다.

이는, 우리사회가 수십년 동안 기성세대의 상처를 방치한 탓이다.

평화와 풍요를 일궈낸 뒤에도 현실과 비현실이 혼재하는 그들 의식의 저변을 깊게 들여다보지 못한 탓이다.

기성세대들이 멈추고 지형을 살피며 함께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 자신의 주변에 설치했던 지뢰를 제거했더라면, 속도를 줄이고 낙오자를 구제하는 여유를 가졌더라면 우리가 이렇듯 이상한 국토 분단 혹은 보-혁간 빈-부간 불통의 냉전에 떨어져 신음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세대가 기성세대에게 어른의 책임을 강요하고, 신세대 눈높이로 정한 지표 아래 어른의 포용과 지도력 부재를 탓하는 것으로 세월을 낭비하지 않았더라면 이렇듯 철저하게 양 세대간 불통의 상황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남북분단에 따른 안보문제를 대면할 때 먼저 우리 내부에서 신구세대의 가늠자 조정을 통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드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