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공인배

대한민국 재계의 최고 부자였고 현대사의 거목이었던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폐암과 맞선 2년 동안 본원적인 질문에 매달렸다.

신(神)의 존재 여부, 창조론의 모호성과 진화론의 실제성 사이에 선 인간적인 의문, 특히 성서의 기록과 현실의 불일치, 선과 악의 문제가 대종을 이뤘다.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 아닌가.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신은 왜 스탈린이나 히틀러 같은 악인을 만들었나"

77세로 생을 마감한 인간 이병철, 그는 죽음을 앞 둔 말년에 종교에 천착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 할 것인가. 종교란 왜 인간에게 필요하며, 영혼이란 무엇인가" 그런 질문들은 궁극적으로 '사람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의문에 귀결됐다.

거기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신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 두었는가. 사후에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성경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라는 말인가"

이병철은 87년 절두산성당의 박희봉 신부에게 그렇게 자신의 깊은 고뇌가 녹아있는 24가지 질문서를 보냈으나, 병이 악화돼 대답을 듣지 못한 채 타계하고 말았다.

거꾸로 읽어 보니 그의 질문에는, 평생 동안 돈을 좇았고 누대를 거쳐서도 쓰기 어려울 정도의 부를 축적했으나, 그것이 고통을 막아주거나 없애주지 못한다는 발견이 있다.

또, 당대 절대 거부(巨富)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그가 걸어 온 부정(不淨)한 지점의 발자국들을 돌이켜 보며, 천국의 조건 앞에 좌절하고 죄를 짓게 내버려 둔 신의 침묵에 대한 원망이 있다.

그래서 그는 질문들에서 신을 부정하고 싶었고, 자신의 생멸이 그저 자연현상에 불과하다고 믿고 싶은 인간적 역심(逆心)도 드러냈다.

또는 아직은 돈으로 과학의 산물을 사서 무병장수 할 수 없는데 대한 안타까움이 질문 전반에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이병철이 당시 언론과 한 죽음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보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건 아닌 것으로 읽힌다. 다만, 죽음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죽음을 앞두고 한 인간으로서 던진 인간과 종교에 대한 그의 깊은 물음은, 죽음 앞에서는 지위 고하도 빈부도 없다는 것을 명증한다.

그가 질문들에서 보인 성경에 대한 애증을 볼때, 10계명 중에서 예수가 우리에게 말했던 유일한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 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병철은 그 자손들에게 부(富)만을 세습한 것이 아니다. 희수(喜壽)에 이르기까지 인간으로서 도를 넘는 부를 누렸으나, 자신이 도외시했던 절대가치를 향해 손을 뻗은 자화상도 함께 남겼다.

그것은 불행했던 삶을 성찰하는 노옹의 겸허한 태도이고, 서로 사랑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경험의 거울이었다.

그러나 그의 셋째 아들 이건희가 운영하는 삼성은 최근 1조원대의 재산다툼으로 세간의 구경거리가 됐다.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와 차녀 이숙희는 아버지의 유산이 잘못 분배됐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이건희가 공개적으로 한푼도 내줄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하면서 골육상쟁의 서막이 올랐다.

이맹희는 80세이고, 이숙희는 아버지의 향년과 같은 77세다. 또 이건희는 70세다. 하지만 그들은 10대들보다 더한 설전을 벌이고 있다.

이건희는 열살이나 위인 친 형을 '수준이하의 자연인'으로 매도했고, 맹희와 숙희는 이를 두고 형과 누나에 대한 어린애 같은 막말로 규정하면서 "늘 자기 욕심만 챙겨온 건희"를 질타했다.

이에 대해 이건희는 "이맹희는 집에서 퇴출된 양반, 이맹희는 감히 나보고 '건희' '건희'할 상대가 안된다. 날 쳐다보고 바로 내 얼굴도 못 보던 양반이다"고 맞 받았다.

이건희가 오랫동안 향유해 온 제왕의 지위를 단번에 알게되는 순간이다. 우리 사회가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낡은 시대의 유산으로 여긴다 하더라도, 혈육간의 서열이 언제부터 돈으로 정해졌던가.

이건희는 저잣거리로 내려왔다. 아니, 처음부터 그는 저잣거리에 있었다. 그는 자신을 향한 이목이 어떤 것인지 보다 자신의 지엄한 목소리가 구석구석까지 전달되는 사회구조에 도취된 모습이다.    

무한경쟁의 시장, 그 피라미드 꼭대기에 이건희가 있고 언론에게 그에 관한 동향은 상품가치가 높다. 이건희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건희가 마음만 먹으면 사적인 가족사를 공론화시킬 수 있다. 그의 언행에 대한 책임이 거기에 비례하는 이유다.

이병철은 제왕 이건희를 원치 않았다

이건희의 천문학적인 재산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그가 보유하고 있는 삼성생명을 비롯한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의 주식 시세를 보면 지난 24일 오전 11시 8분 기준으로 10조7,273억원에 달한다.

탐욕, 그 끝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안하무인의 경제권력을 대물림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브라운관에 비치는 이건희는 불편한 노구를 이끈지 오래다. 그러나 이병철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지 않다. 경제권력이란 몰도덕성 위에서만 건재한다는 것을 웅변하는 듯 하다.       

이건희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이남곡(신인문운동 사상가)이 예고하는 바와 같이, 그를 통해 우리는 명백히 선택의 갈림길에 맞닥뜨린 걸 직감한다.

자본주의가 대안을 찾지 못한 채 붕괴해 다시 야만과 혼돈의 상태로 돌아갈 것인가. 인류는 멸망의 길이 아닌 생존의 길을 택해 무소유 사회에 근접하는 진화를 이룰 것인가.

인간의식의 진보는 과학과 보폭을 같이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명제를 제시 했던 프랜시스 베이컨은 "약간의 과학은 사람을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러나 더 많은 과학은 인간을 다시 신에게 돌아가게 한다"고 설파했다. 이병철이 이건희에게 '서로 사랑하라'를 물려주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