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공인배

땡볕의 5월, 아스팔트 위에서 스미지 못하는 선홍빛 젊은 피가 투명한 불꽃 무리를 이루며 허공을 가득 채우던 그날의 기억이 한 세대를 지나왔다.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광란의 봄, 시민들을 굴비 엮듯 도로 바닥에 엎어놓고 군홧발로 목을 밟았다. 군인들의 곤봉은 하늘을 찌르고는 곧장 시민을 내리 찍었다.

무자비한 곤봉은 어디든 가리지 않았다. 튕겨나가거나 파고들거나 뼈를 부수었다. 살과 피가 튀어 검게 응고 된 길 위에서 시민들은 나뒹굴며 "나는 시민이다"

신음했다. 길과 길이 그 목소리를 전했고, 더 많은 시민들이 길 위로 뛰쳐나왔다가 길 위에서 사라졌다. 군홧발 소리에, 총성에 달아나다 흠칫 고개를 돌린 사이였다.

같이 달리던 사람들이 겉옷을 벗긴 채 트럭에 실려 무더기 무더기 어디론가 사라졌다. 총칼에 찢기고 총탄에 구멍난 시신들도 트럭 위에 쌓여 사라져갔다.

국민의 안녕을 위해 존재하는 군인들이 국민을 공격했다. 국민은 단지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두환의 퇴진을 요구했을 뿐이다.

갱단과 다를 바 없는 군부의 정권장악을 위한 수단인 비상계엄령 해제와 언론자유 보장을 요구했다. 누가 생각이라도 했겠는가. 군인이 국민에게 자행한 만행을.

5.18은 불의와 폭력에 맞선, 행동하는 시민들의 기록이다. 억압과 학살로 점철된 불의한 권력 혹은 정신병자들에 대한 기억이다.

오늘 우리가 전두환과 그 유사세력들을 엄중히 심판했는지 다시 물어야하는 이유다.

1980년, 32년 전의 봄은 이제 제2세대의 기억에 올바르게 옮겨 심어져야 한다.

하지만 앞선 5.18 제1세대는 철권통치 아래 무너졌던 민주주의의 폐허 위에서 무엇을 했나. 30여년 동안 체제 복원과 불의 청산의 성적표는 부끄럽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오월의 정신은 지난 세대의 중심을 관류하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가 '참여'를 국정 기조로 삼기는 했으나 덜컹거렸고, 이명박 정부에서는 민주주의가 한 세대 이전으로 퇴행했다.

참여정부는 '가치' 복원에 사활을 걸었지만, 기득권 세력들은 그 대척점에 섰고, 권력 3부는 '가치' 우선의 방향성에 낯설었다.

일선에서 확신없는 기치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경제 성장은 둔화됐고, 국민의 체감경기는 곤두박질 쳤다. 준비되지 않은 손발에 참여정부는 좌충우돌하며 큰 낭패감에 사로잡혀야 했다.

독점구조를 깨서 더 많은 경제주체들이 이익과 기회를 분점하고, 과도하게 많이 소유한 사람이 서민의 복지에 더 많이 기여토록 하는 장치를 세우고자 하면 필경 위축을 부른다.

민주주의 안에서 공동선(共同善)의 가치는 경제 지배세력들이 해독하지 못하는 난수표와 같다. 시장(市場)을 제한하며 시장의 질서를 교란하는 반 경제요소일 따름이다.

참여정부가 당대에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적어도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수준에서 경제의 균점, 혹은 경제의 선순환구조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성급한 국민은 일시적으로 겪어야 할 부작용에 놀랄 뿐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질이나 경제 평등 구현에 더이상의 시간을 투자 할 수 없었다.

재벌이 주도하는 양적인 경제성장을 선택했다. 재벌들이 이 나라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관점에 그동안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던 탓이다.

기득권세력들이 전가의 보도로 항용하는 '한 곳에 쌓이면 넘쳐 흐른다'는 신기루를 좇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재벌들은 투자하지 않고 중소기업이나 상인들의 업종을 잠식하며, 거둬들인 돈은 시장에 유통시키지 않는다.

5월을 계승한 세대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절대다수, 야합하거나 아예 기득권 세력화 된 그들이다.

남아있는 이들은 모두 종속변수에 불과하고, 열패감에 빠져 끊임없이 극단의 무리수를 내밀며 더이상 밀리지 않기 위해 버티는 꼴이다.

‘가치’에 몸을 던지는 ‘소수’

벼랑 끝에 몰린 민주주의, 그 같은 지점에 소수의 동지들은 함께 서있다. 그나마 광포한 기득권세력을 향해 발언 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더 자세히 말하면, 벼랑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까치발을 세우는 위태한 이들이 바로 5월의 잔존 세대다.  

5.18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민주주의의 시계가 거꾸로 돌고 있기 때문이다.

용산참사를 보자. 남일당 건물 옥상 망루에서 무리한 진압에 불타 죽거나 부상을 당한 영세상인들은, 기존의 낡은 상가 건물들을 허물고 40층짜리 주상복합건물을 세우는 도시정비사업으로 생계 수단을 잃게 된 시민이었다.

한진중공업과 쌍용자동차 사태는 사용주가 노동자들을 무더기로 정리 해고하면서 발단됐다. 공권력은 농성 노동자들을 탄압했고, 수많은 가장들이 목숨을 끊었다.

민간인을 사찰하는 정부다. 공권력을 부당하게 사용할 때 마다 언론을 통제했다. 나아가 언론의 비판기능을 말살하고 친 기득권세력 언론을 육성했다.

그러나 고압적이고 일방적인 공권력이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 할 때 그곳에는 소수의 저항만 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주장을 관철시키려 했지만, 나중에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부당성과 반민주주의를 세상에 고발하기 위해 희생되어가고 있다.

5월의 정신은 한 세대가 지나도록 육화되지 못했으며, 5월의 세대는 모두 흩어졌다. 5.18 제2세대가 그 시대정신을 계승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지금 이 왜곡된 사회체제는 점차 새로운 사회체제로 대체 될 것이다. 누가 그 새로운 세대의 개혁 노선을 향해 완전한 5월을 전할 것인가.

표피적인 변화가 완결된 뒤 또다른 변화를 위한 갈등의 악순환에 휘말리지 않게 할 주체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5.18은 텅 빈 길 위에 서 있다. 

초여름에 가까운 이 봄, 난데없이 엄습하는 한기에 몸서리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