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공인배

통합진보당의 내분이 결국 검찰의 망동을 불렀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지난 21일 중앙당사에 들이닥쳐 20만여명에 이르는 당원명부를 압수해갔다.

그동안 언론에 보도된 당원의 증언 등을 검토한 결과 압수수색에 필요한 범죄 요건이 갖춰졌다는, '사법적 판단'을 외피로 입고 있지만 그닥 신뢰가 가지 않는다.

사전에 자료제출이나 열람을 요청하는 최소한의 수사절차도 지키지 않은 난데없는 검찰의 행동이다.

공교롭게도 21일은 진보당이 사태 해결의 결정적인 고비를 맞이한 때였다. 혁신비상대책위가 경선부정 논란을 낳은 비례대표 후보 전원 사퇴를 권고한 최종시한이었다.

계파이기주의를 뛰어 넘어 공당의 필요충분조건에 헌신하는 '책임'을 확인 할 순간이었다.

진보세력은 피해의식을 속성으로 지닌다. 피지배 쪽을 대변하는 저항세력이다. 소수자의 고달픔을 뼈속 깊이 안다. 온 몸을 던져 사선을 넘나들어야 비로소 지배세력을 테이블 앞에 앉힐 수 있었던 그들이다.

소수자로 전락하는 데 대한 공포를 딛고 주도권 다툼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지, 꽉막힌 정국에서 정치적 퇴로를 찾아낼 수 있을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때였다.

당권파는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못했으면서 "정황이 있다, 의심이 있다"는 식의 모호한 표현으로 총체적 부정·부실로 스스로를 낙인찍은 조사보고서를 불신했다.

재진상조사를 실시하고 모두 납득할 수 있는 진실 공유를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비당권파는 사태 초반에 과도하게 서둘렀다. '경쟁부문 비례대표 당선자 및 후보자 전원사퇴, 비례대표 1석 반납'을 내부 조율도 없이 대외적으로 선언해버렸다.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조사보고서 부실 지적에 대해서도 "일부 미흡한 점이 있었다"는 정도의 두루뭉술한 태도를 보인 게 전부다.

이런 즉각적인 조치는 비당권파에게서 타이밍을 빼앗았다. 발표된 조사보고서의 파괴력은 이미 당권파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수준이었다.

지난 12일 중앙위원회의 폭력사태는 기회를 박탈당한 소수자의 반발이었다. 정파간 첨예한 대립이 장기화 된 원인은 당권파의 의도이거나 당권파의 '미숙'이다.

현장에서 장기간 대치 할 경우 갖지 못한 쪽이 전적으로 불리하다. 가진 쪽은 손실을 감수하면 되지만 갖지 못한 쪽에서 담보해야 할 것이라곤 목숨 뿐이다.

노동자는 전부를 걸어 호소하는 방식으로 사지에 떨어진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외부의 지원을 끌어내 세를 불린다.

이런 결연한 태도는 '경직'이다.

진보진영이 어떤 사안에 맞닥뜨렸을 때 급속하게 심각해지는 것은 '경직'의 신호다.

대화 현장의 출구가 초장에 막혀버린다. 관철시키려 할 뿐 상대의 의견은 이쪽의 행동을 부정하거나 혹은 힘을 빼는 의도로 간주하는 탓이다.

우리의 진보는 그렇게 성질이 급하다. 극한의 환경에 처했을 때 상대의 탄압보다는 제풀에 세상을 등지는 이유다.

긴장의 강도가 현장의 상황에 맞지 않고, 지나치게 앞으로 나갔다는 판단이 들어도 돌이키지 못하는 것은 '후퇴는 죽음이다'는 강박에서 비롯한다.

돌이키는 것은 자기부정이고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현장인식, 그것은 자신의 갖지 못한 처지를 알아챈 '진보'의 생존 방식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진보당 내분의 장기화는 진보세력의 파멸을 함의했다. 내부분열이 가속화되고 외부의 눈은 싸늘해졌다.

진보당은 현장의 진보세력을 아우르고, 결핍을 인지한 모든 사람들을 대표한다는 점을 미처 깨닫지 못한 댓가다.

현장의 실패는 국부적인 것이지만 공당의 파행은 이 나라 서민과 노동자들에게 좌절을 안겨준다는 것을 도외시한 탓이다.

공당은 명분과 실리의 균형점 위에 놓여 있기에 다수의 행복을 위해 물러설 줄 알며, '투쟁'이 아니라 '무혈 전쟁'의 사령탑이라는 걸 깊이 인식하지 못한 결과다.

공당(公黨) 부화(孵化), 출구가 막혔다

지난 21일은 그런 진보당이 대립의 구도를 해체하고 융합의 진통을 끝내야만 하는 지점이었다.

자율성을 갖춘 책임있는 공당의 구성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멸사봉공의 순교를 감행 할 기회였다. 

당이 상실한 신뢰 복원을 위해 계파의 이익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일선에서 비켜 주는 것은 장기 레이스에서 순환의 덕목이라는 것, 거기에서 패배란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는 것, 내부 구성원간 이해관계가 얽힐 경우 결단이 빠를 수록 향후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리로 복귀하는 기회의 폭도 넓어진다는 것, 그런 통찰로 더 넓은 물 길을 낼 분수령이었다.

그러나 검찰은 이날, 진보당의 자정(自淨) 기회를 가로채고 자율의지를 꺾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공당을 파괴했다.

우리는 진보당이 자신을 쇄신하고 국민에게 용서를 구할 주체조차 없이 진보당이 표류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검찰의 경선부정 수사와 직접 관계도 없는 당원명부 압수는 국민의 참정권을 위축시키고 정당 정치활동의 기본권을 침탈한 사태다.

특히, 부화의 진통을 억지로 막아서 진보당이 여전히 현장운동가들의 집합체로 머물게 하는 빌미를 줬다.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인 진보당은 내부의 문제를 방기하고, 외부의 적인 공안당국에 결사항전하는 체제로 전열을 정비하지 않겠는가.

시험대 위의 공당을 끌어내린 검찰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