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공인배

오뉴월, 가슴 속 들뜬 열이 머리로 치밀어 오르는 건기(乾期)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10 민주항쟁 기념일을 지나 6.25 동란 62주년을 마주하는 동안 해갈비는 없었다.

군부 쿠데타 세력이 광주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1980년 5월, 전 국민적 투쟁으로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화의 서막을 알린 1987년 6월, 이 두 사건의 끝과 시작의 중간 지점에서 한 세대(30년)를 사이에 두고 6.25는 낯설지 않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설익은 이념 대립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이후 두 세대(62년)가 흘러서야 민중 스스로 '주인'임을 선언했으나, 우리의 민주주의 시계는 5.18 이전 6.25와 가까운 방향으로 25년 동안을 거꾸로 돌았다.

왕정지배가 수반했던 착취와 억압에 대한 순응, 그 500년사의 장구한 관성에서 풀려나기 어려웠던 점을 인정하면 우리는 스스로 열등하고 관대한 자화상을 발견한다.

민중들은 줄곧 힘을 가졌던 쪽을 용서해 왔다. 세상은 지배했던 자 혹은 지배 할 수 있는 자가 지배하는 것이라는 노예근성의 발로였다.

민중들이 자신을 피지배 부류로 설정하고, 철권통치나 독단통치에서 파생되는 모든 위해 환경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한 반민주 지배세력에 대한 단죄란 있을 수 없다.         

남과 북 체제 분립을 낳은 이념 갈등이라는 게 결국 강권에 의한 폭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었지만, 온 산하에 흩뿌린 피와 살이 한낱 지배계층의 제단에 바쳐지는 데 머무르게 된 배경이다. 한 세대 동안 꽃이 피지 않는 동토를 우리가 견뎌야 했던 이유다.

열등한 우리가 친일 수구세력을 척결하는 대신 관용의 미덕을 택한 순간, 이유도 없이 용서받은 친일 수구세력은 마땅히 지배자의 지위를 얻고 용서와 순종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는 민중들 위를 군림했다.     

 6.25와 5.18이 다른 게 뭔가. 심장에 구멍을 내는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믿었고 믿을 수밖에 없던 자의 살육이었다. 절망은 거기에서 비롯했다.

도대체 이념이 무엇인데, 죽여야 하고 죽어야 이룰 수 있다는 것인가. 자유와 기회를 제한하는 것에 대한 저항이 표층에 있었으나, 유혈 충돌의 본질은 지배 진영간 헤게모니 다툼이거나 점령군의 탐욕을 채우고 유지하려는 획책이었다.

지극히 보편적인 권리를 얻기 위해 목숨을 담보했던 이들은 지배권력을 위한 희생양이었을 뿐이다. 지난 8일 인면수심의 전두환이 육군사관학교에서 5공의 주역들과 함께 육사생도들을 사열한 일은 그 현주소를 극명하게 방증한다.

12.12 쿠데타의 수괴 전두환은 1980년 5.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로 정권을 장악해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있었다. 광주시민들은 이에 항거했으나 모든 정보기관과 언론을 신군부가 통제하는 상황에서는 한낱 국가의 안녕을 위협하는 폭도들에 불과했다.

전두환의 집권 시나리오는 소위 광주 폭동을 진압하면서 오히려 탄력을 받은 것이다.

지배세력에 전적으로 유리한 대통령 선출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꿔야 한다는 정치권의 개헌 논의는 비상계엄으로 철저하게 봉쇄됐다.

게다가 유혈이 낭자한 광주의 5.18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전두환을 구국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이같은 맥락에서 보면 6.10 민주항쟁의 가장 큰 의의는 전두환의 졸개이자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개헌하겠다는 약속을 6.29 선언에 삽입한 것일 터다.

전두환은 김영삼 정부에서 내란수괴. 반란수괴, 내란목적 살인죄가 인정돼 원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자다.

더구나 전두환은 12.12 군사반란 당시 위계질서를 생명으로 삼는 육군의 소장으로서 육군참모총장 등 상관들을 무력화시킨 하극상 만으로도 현장에서 사살됐어야 했다.          

그가 이 나라 군의 지휘관들을 배출하는 대표적인 군사학교에서 예비 지휘관들로부터 경례를 받은 것이다.

육사의 관리주체가 생도들에게 무력을 장악한 자는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현장이었다.

대법원이 전두환에 대해 무기징역형을 선고했으나, 그로부터 8개월도 안 된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정부가 임기 말 국민화합이라는 명분으로 그를 사면복권한 결과다. 그 나흘 전에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은 거기에 동의했었다.

청산 없는 역사정의는 불립(不立)

이들은 광주시민이나 국민의 뜻과는 무관하게 지배력의 연장 또는 지배세력으로의 편입을 위해 주저없이 야합한 민주주의 세력의 대표들이다.

민중들의 피와 땀을 댓가로 지배력을 확보한 그들이 민주주의를 유린한 자들과 공존했고, 상처투성이 민중들에게는 가해자들에 대한 용서를 강요한 것이다.

정권은 바뀌지만 경제, 사회 민주주의가 미약하거나 오히려 퇴행하는 것은 보수화 된 중도 지배세력과 낡은 보수세력간의 교집합 범위가 갈수록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 등쌀에 부당한 구조에 저항하는 진보세력은 백척간두에 서고, 미래를 열 대안은 허용되지 않는다.  

'색깔론'이나 '종북논란' 같은 낡은 낙인찍기가 여전히 보수세력의 칼이 되고, 지배이념이 민주주의를 멋대로 재단 할 수 있는 것은 '청산 부재'에서 비롯한다.

우리의 어설픈 미덕 '용서'는 강자에게 살육을 승인하고 초법적 독단과 군림 할 지위를 내어준다.

권력을 쥔 쪽의 부채의식 부재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논바닥이 쩍쩍 갈라지는 한파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렇게 간절 할 때 우리가 택한 길은 공동선을 향한 연대였다. 오뉴월에 민주주의의 잔혹사가 몰려있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부당한 것에 틈을 보이지 않아야 민주주의는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