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최근 개봉과 동시에 흥행 열풍을 일으키고있는 영화 ‘지슬’은 미국 선댄스영화제의 세계영화드라마 경쟁부문에서 최고상인 심사위원대상을 차지한 작품이다.

한국영화 사상 최초의 일이다. 심사위원들이 1분도 채 안돼 만장일치로 이 대상작을 선정했다는 낭보는 한반도를 감동의 도가니에 빠뜨린 한편의 드라마였다.  

하지만 ‘감자’의 제주방언인 ‘지슬’은 1948년에 벌어진 4.3사건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제주 양민들을 추적한 영화다. 동시에 무모한 명령을 받고 양민들을 학살한 무장군인들을 그리고 있다.
영문도 모른 채 무장군인들을 피해 동굴로 숨어든 제주 사람들이 감자를 나눠먹으며 버틴 60일이 ‘지슬’의 시공간이다. 하지만 카메라의 각도는 그들의 공포가 아니라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 대한 무지에 고정되어 있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밖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공산주의자로 간주해 사살하는 군인들 또한 무지의 꼭두각시들이다.  

‘지슬’에서의 비극은 피투성이로 어필되는 것이 아니라, 이념 따위에는 관심 조차 없는 순박한 인간성과 닥쳐 올 운명을 전혀 예상치 못하는 평온한 공동체에서 투영된다.

뇌리에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을 이 영화의 이미지와 느낌들은 무방비 상태의 그들을 노리고 안개 처럼 덮쳐드는 무표정한 광기가 자아낸다.

‘지슬’을 구성하는 요소들인 제주 방언이나 풍광, 문화, 그들의 역사 어디에서도 군인이 양민을 총으로 쏴죽이는 개연성을 발견 할 수 없다.

숨막히도록 아름답게 포착된 이미지들은 끊임없이 무지한 사람들과 오버랩되며 4.3사건의 참혹했던 광풍을 각인한다.

무장군인들 역시 무지했다. 공산당들을 향한 발포라고 믿었으므로 하늘도 두렵지 않았다. 그들이 난사당한 시신들을 제대로 매장 하지 않은 이유다.

카메라는 제주도 아니, 동굴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보따리 하나 들고 어쩔줄 몰라하는, 혹은 동굴밖으로 나와 반갑게 웃는 이웃을 사살한 무장군인들 때문이었다.

그들이 진실을 알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국가 권력이 죄없는 국민을 죽이라고 명령했던 경험이 일찍이 없었기에 지켜야 할 국민을 오히려 해친 그들은 오들오들 떨었다.   

10년 전 정부의 진상보고서에 따르면 1948년 4.3사건으로 희생된 제주 도민들은 3만명 가깝다. 희생자 가운데 10살 이하가 5.8%, 61살 이상이 6.1%, 여성이 21% 등으로 나타났다. 4.3사건이 아무것도 모르는 도민들을 학살한 만행으로 규정되는 이유 중 하나다.

잊혀져야 할 치욕의 역사였다. 더구나 사후 군복을 벗은 군인들에게는 그 지점의 역사 지우기란 생존의 문제였다. 제주도의 구성원으로 함께 살아가는 그들이 52년 동안 당시의 기억 자체를 좌익의 씨앗으로 간주하고 탄압에 앞장섰던 배경이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을 지옥에 빠뜨린 당시의 국가 권력은 일말의 죄의식도 없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슬’은 그 망각의 지점에서 불편한 기억을 쫓지만 단죄해야 할 대상의 추상성에 무력감을 느끼는 듯 하다.

이제와서 4.3사건을 돌이켜보면 제주 도민들은 죽었거나 살았거나 모두가 피해자였다. ‘지슬’은 아직 원한이 풀리지 않은 미제의 역사가 갖힌 동굴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런 한계에 관객들의 가슴은 더욱 먹먹해지는 것이리라.

엿새 전 4.3사건은 65돌을 맞았다. 김대중 정부가 2000년 1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획복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한 이래, 노무현 정부에서 진상조사가 이루어져 2003년 대통령이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을 인정하고 제주 도민들에게 공식 사과한 것이 전부다.
이명박은 5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위령제에 참석하지 않았다. 보수단체들은 4.3사건이 좌파진영에 의해 미화됐다고 흔들어댔다.

그 바람에 제주 도민들의 숙원인 추모기념일 지정 문제는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으며, 평화공원 조성 지원은 2009년 이후 예산 배정이 없어 중단됐다.

또 유가족들에 대한 실질적인 생계비 지원은 아예 이루어지지 않고, 미흡했던 분야에 대한 추가 진상규명 사업은 조사인력과 예산 부족으로 지지부진한 실정이다.  

우리는 4.3사건 이후에도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배신의 역사는 지금까지 계속 점철됐다. 동족끼리 총뿌리를 겨누는 6.25 동란을 겪었고, 휴전 이후에도 수많은 우국지사들을 잃었으며, 정권을 연장하려는 국가권력의 무소불위 철권통치에 수많은 민주투사들이 희생됐다.

1980년 5월에 이르러서도 국가권력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도시의 한 복판에서 국민들을 향해 무자비한 난사를 자행했다.

비극은 유린당하는 ‘무지’

이념을 빙자한 권력의 암투와 정통성 없는 권력의 유지 혹은 권력을 쟁취하려는 야욕이 범람하는 경계에서 국민들은 늘 희생양이었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권력은 소멸하지만 현장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생존문제를 놓고 대치하며, 이 양대 진영의 규모는 점증해왔다.

‘지슬’은 침묵을 원하는 자와 말하려는 자의 사이에서 더 이상을 가르키지 못한다. 그것은 오히려 제3의 국민들에게 ‘무지’의 위험성을 웅변한다.

다음의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의심하라. 인간 처럼 잔혹한 존재가 어디 있으랴. 가장 먼저 목적이 있는 자를 경계하라”는 경구가 ‘지슬’에 담겨있는 역설이 아닐까.

바로 그것이 영화 지슬이 비추는 우리들의 비극이 아닐까.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11일 대통령 후보로 제주도를 방문해 4.3사건의 완전 해결을 공언했다. 그러나 그 첫 걸음이 될 4.3위령제에 참석하지 않았다. 제주도민들의 상실감을 언급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4.3사건 문제 해결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동시에 어루만지는 스킨십이다. 박 대통령에게 국민통합 마인드가 희박해 가해진영에 힘을 실어주는 건 아닐까 가슴졸인다.

불의(不義)의 득세와 국론 분열은 불안의 기제다. 공감하는 결과를 낼 수 없다. 이명박 정부가 방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