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최근 익산시의 고위 공직자와 담소를 나눌 자리가 마련됐다. 어쩌다 문화재단이 주제가 되었는데, 그 분이 문화재단의 개선해야 할 이런 저런 의견을 교환하다가 이 쪽의 말을 뚝 자르고 나서는 지점이 있었다.

“비리 문제는 방치해선 안될 문제지만, 정체성 얘기 하면 답이 없죠. 끝이 없어요” 소통신문이 얼마전에 문화재단의 정체성 부재를 지적한 것에 대한 그 분의 견해였다.

정체성 담론의 무용성을 거듭 강조하는 그 분의 뜻을 헤아리는 동안에 담소의 화제는 다른 것으로 옮겨가고 말아 그자리에서는 정체성과 관련해 더이상 진전된 대화가 오가지 못했다.

공직생활이 38년 째에 이르렀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북 문화의 관제탑을 맡아 온 백전노장의 말이었으므로, 숙고해야 할 말이었다.    

경륜 앞에서 이쪽의 어떤 대꾸든 단견에 불과했으리라. 당장에는 그 분의 말을 실용의 측면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화재단의 설립 취지란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폭이 달라지는 데다, 문화재단의 정체성이란 명시적인 취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라는 광활한 지도 위에서 끊임없이 융합하고 영토를 확장해나가는 가변성을 지닌다는 의미가 그 분의 말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리라.

그 분의 어법을 따라가면, 너무 다양하고 복잡한 체계 위에 있는 문화재단의 정체성은 난해하며 그러므로 모호하기까지 하다.

실용의 축면에서 본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익산시의 출연으로 운영되는 문화재단은 제한된 예산에 제약을 받고, 지역의 인적 물적 문화자원의 한계에 봉착해 있는 것이니까.

따라서 그 분의 말에는 지역 언론이 문화재단의 정체성을 언급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라는 생각이 담겨있다. 현실적인 결핍에 대해 유토피아적인 잣대로 갑론을 제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일 게다.

여기에 은유되어 있는 말은 의외로 강하다. “지역언론이 정체성을 지적하는 것은 문화재단을 트집 잡아 흔드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말문이 막힐 수 밖에 없다. 문화재단 문제에 앞서, 오랜 세월 공직에 몸 담아 온 그 분의 근본이 해체된 사고방식에서 오늘을 사는 공무원들의 현주소가 투영됐기 때문이다.

그 분에게 공무원의 정체성을 말하면 트집잡는다고 할까. 신조나 의무로 나타나는 공무원의 정체성은 해석에 따라 범위와 무게가 달라지니, 정체성을 얘기하자면 끝이 없다고 말할까.

청렴·성실·복종·친절·공정 같은 의무를 놓고 그 수준을 얘기 하면 할 수록 공무원을 위축 시킬 뿐 답이 없다며 그 분은 또 이 쪽의 말을 막을까.  

정말 그럴까. 정체성은 조직의 효율적인 운용을 저해하는 부정적인 기제일까.

지금 이런 생각들은 침소봉대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최근 익산시 공무원들이 자행한 비위사실들과 식물화된 감사 기능은, 익산시 공직사회와 그 분의 의식수준이 공유하는 도덕적 해이와 무사안일, 무소신, 무책임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방증하기 때문이다.

공무원 A과장은 전임 부서에서, 농경지의 침수를 막기 위해 조성하는 2만평 규모의 유수지(홍수시 물을 가두는 인공 호수) 계획을 수립하고 현장 조사와 타당성 검토 등 사전 절차를 마친 인물이다. 후임 과장이 유수지 공사를 발주했는데, 포크레인으로 몇 번 파 내려가자 땅 밑에는 온 통 쓰레기 더미였다.

확인해 보니 이 사업부지는 과거 익산시의 쓰레기매립장이었다. 땅을파서 웅덩이를 만드는 공사였는데, 사전에 땅 밑에 무엇이 있는지를 적절하게 조사 하지 않은 탓이었다.

유수지 사업부지를 옮길 수도 없는 마당이었다. 토지를 이미 매입한 현실적인 문제와 위치상 적지로 판단한 역학 때문이었다.

익산시는 유수지 설계를 변경해 추진하고있다. 하지만 쓰레기 매립장을 농지가격으로 사들인 익산시에 대한 의혹은 여전히 짙게 남아있다.

더구나 익산시는 A과장에게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래서 부지 매입과 허술한 현지 조사가 의도적인 것일 수 있다는 추론을 낳았고, 이것은 징계권자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을 나았다.

A과장은 또 지금 맡고 있는 부서에서, 거리가 크게 동떨어지고 공종이 다른 공사들을 통합해 감리용역을 발주해 불법 논란을 일으켰다. 이는 통합감리 조건인 200억원 규모를 맞춰 특정업체에 공사를 몰아주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고, 익산시는 즉각 이 감리용역 발주를 철회했다.

그런데 익산시는 이번에도 A과장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래서 이 일도 징계권자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익산시 상층부가 A과장을 비호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확산시키고 있다.

공무원 B과장은 어떤가. 가축분뇨가 퇴적되어 있는 주교저수지 약 4만7,520평을 49억원에 사들여 생태 습지로 조성하겠다고 의회에 공유재산 관리계획안을 상정했다.

의회가 과다하게 산정된 토지매입비를 지적하고 안건을 부결시키자, 매입 대상 면적을 4만6,437평으로 줄이고 매입가격을 35억으로 낮춰 안건을 재상정 했다.

의회가 약 15억원의 예산 손실을 막은 꼴이다. 의회가 안건을 허술하게 심사했을 경우 익산시는 15억원의 예산을 낭비하고 토지 소유주들에게 그 만큼의 이익을 공여했을 것이니, 배임 여부를 판단해야 할 사안이다. 하지만 익산시는 B과장을 문책하지 않았다. 이 역시 징계권자와 무관하다면 방치한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는 사안이다.

B과장은 또, 왕궁분뇨처리장의 지연배상금으로 약 91억원을 부과해야 하는데 11억원을 부과했다. 80억원 가량의 세외수입 손실이 발생했다. 당사자간 법률행위의 근간인 협약을 준수하면 되는 사안이었는데, 협약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지연배상금을 적게 부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 흔적들이 보인다.

그러나 공신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요식행위들이었다. 드러난 사실들은 그 댓가가 무엇인가는 말해주지 않지만, 부적절한 행정행위의 목적은 명백하게 가르키고 있다.

B과장은 연거푸 배임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익산시는 B과장을 또 내버려두고 있다. 이 또한 징계권자가 B과장이 벌인 행정행위와 자신의 상관관계를 해명해야 할 엄중한 사안이 됐다.   

환부를 방치해 괴사할 것인가

불필요한 오해를 사고있다. 치명적인 위험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익산시의 정체란 들키지 않으면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양상군자인가. 들키더라도 어물쩍 넘어가거나 교묘하게 빠져나가면 된다는 요행심이 만연한 곳이 익산시 공직사회인가.

지금 익산시에 필요한 정체성의 표상을 묻는다면 ‘세류영’은 어떨까 한다. 그것은 중국 한나라의 장군 주아부가 전장터에 세운 것 으로 신상필벌 시스템이 적확하게 가동되는 군영 이었다. 병사들은 군령을 받들 뿐, 군법의 예를 행하되 황제의 행차 조차 환대하지 않았다.

세류영은 견고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다. 그래서 적군과 격돌하면 반드시 이겼다.

전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다. 국민의 혈세를 쓰기를 자의적으로 하고 군색하게 변명을 늘어 놓는 공무원을 지켜줘야 할 유능한 인재라고 할 것인가.

환부를 도려내지 않고 방치해 괴사하는 것이 익산시의 정체는 아닐 것이다. 지금 익산시를 향해 정체성을 말하지 않으면 무엇을 말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