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호남 사람들은 혁신을 낳는 변화의 주체들이자 동시에 내일의 제단에 자신을 바치는 희생자들이다.

11년 전엔 영남사람 노무현에게 대권을, 두달 전엔 서울사람 김한길에게 당권을 넘겨줬다. 간섭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릴 줄 알았다.

지역할거주의를 타파하고, 반칙없는 세상과 보통사람이 잘사는 세상을 열어 줄 '노무현 바라기', 그것이 전부였다. 그 댓가로 극심한 역차별을 감내했고, 오히려 보통사람들을 벼랑끝으로 내 몬 참여정부의 성적표 앞에서 좌절했다.

고실업, 고용불안정, 대규모 비정규직 노동자의 누적, 소득분배구조의 악화, 가계부채 1천조 시대, 빈곤층의 확대 같은 극지방의 체감지수에 한동안 갈 길을 잃은 채 망연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호남사람들은 그로부터 5년 뒤에 다시 기득권을 버렸다. 민주당의 사분오열된 계파간 대립구도를 해체하고 지속가능한 정당을 재건해 줄 대안이자 차선, 김한길을 당 대표로 선출했다. 최고위원 선출에서도 호남 정치인들을 전면 배제했다. 

이렇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눈 앞의 실리 버리기를 포기하지 않는 호남사람들 앞에 이번에는 안철수가 다가왔다.

지난 18대 대선을 앞두고 좌우 통합의 기치를 내세우며, 지금까지 이 땅에는 없었던 새로운 정치의 창출을 약속했던 안철수다. 민주당 대통령 경선 후보였다가 돌연 사퇴하고 미국으로 떠났던 그 안철수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새정치가 무엇인지, 어떻게 좌우 통합을 이루낼지에 대해 들어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우리 기억 속에는 그가 남긴 모호한 정체성과 태도만이 잔존하는데, 호남사람들은 이번엔 민주당을 버리는 '모 아니면 도'의 도박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 출범하지도 않은 안철수 신당은 호남지역에서 40%가 넘는 지지율을 이끌어냈고, 민주당 지지율은 급격히 추락했으며 정계에서 퇴출 될 위기에 처했다.

우리가 안철수를 알아야 하는 까닭이다. 그의 신당이 민주당을 대체할 만한 역량을 지녔는지를 가늠해 보아야 한다. 그의 새정치 지표가 도탄에 빠진 국민을 구제할 수 있을지, 그의 생각과 실천 사이에 오류는 없는지 눈을 씻고 살펴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안철수는 서울 노원 병 4.24 재보궐선거에 나와 60.4%의 지지를 받고 당선됐다. 진보신당 노회찬이 비운자리였다. 표면적으로 ‘진보’의 표심을 ‘새 정신’으로 옮기는데 성공한 것으로 비친다. 하지만 노원 병의 민심은 단순히 대세론을 따랐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안정을 택한 것이다.

이는, 안철수가 진보 노선을 선택한 바 없고, 보수와 진보가 교집합을 이루는 지점 쯤이 그가 가리키는 새 정치로 인식된 데 따른 분석이다.

특히, 안철수는 지난 9일 ‘진보적 자유주의’를 자신이 도달 할 새정치의 이정표로 표방했다. 진보적 정치학자로 알려진 최장집을 이사장으로 영입한 자신의 싱크탱크 ‘정책네트워크 내일’이 출범하는 날이었다.    

‘진보’와 ‘자유주의’는 물리적으로 조합이 불가능해 보인다. 진보의 의제는 특정집단에 의해 경제력이 남용되거나 독점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고, 자유주의는 경제력이 재벌에 집중되는 시장 중심의 성장지상주의를 고착화시켜 오지 않았는가.

'진보적 자유주의'는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새정치의 명제 답다. 그렇다면 명제가 드러내고 있는 바와 같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치달아 온 '승자 독식 주의'와 '분배 정의 실현'은 서로 합의를 통해 교집합을 이룰 수 있을까.

자유주의가 진보적이기 위해서는 시장에 비자유적 규제를 가해야 한다. 단적으로, 재벌기업의 시장 독점체제를 제한하고 그렇게 확보한 공간에 중소기업들의 활발한 진입을 허용하는 시스템이 도입돼야 한다.

그 뿐인가. 진보를 닮은 자유주의 창출에 필요한 조처들은 매우 다원적으로 요구된다. 한 마디로 일정 수준의 국가 성장 속도의 조절을 감행해야 한다. 

최장집의 어법을 빌리면, 이는 미국의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A. Przeworski)가 설파한 '전환의 계곡'을 초래 할 것이다.

기존 생산체제는 획기적인 구조전환을 이행해야 하고, 이를 감당할 만한 정치적, 정책적 역량이 '진보적 자유주의 진영'에 존재해야 하며, 재벌기업을 중심으로 한 투자자, 기업가집단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도대체 새정치의 정체가 무엇인가

그렇지 않고서는 자본의 투자회피, 해외로의 자본도피, 해외투자의 확대 등으로 인해 ‘전환의 계곡’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경제는 공동화되고 사회는 크나 큰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같이 위험천만한 이른바 대안적 정책을 집행할 역량을 안철수 신당이 갖출 수 있을까.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무역자유화를 포함하는 세계화라는 국제환경적 압력과 조건, 재벌중심의 경제적 생산체제의 특성, 그 정책을 위한 정치적 지지의 동원, 신자유주의적 및 성장이데올로기, 사회적 힘의 관계 등, 여러 측면과 여러 힘들이 연관되어 작동되는 조건을 과연 극복할 수 있을까.

정치가 생활에 기초를 둔 사회경제적 이슈영역을 중심적으로 대면하고, 민주주의를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정치적·사회적 힘들이 필요한데, 당장 정치적 무관심·냉소주의·투표율의 하락현상이 보여주는 저조한 정치참여의식을 변화시킬 동력을 '진보적 자유주의'는 지녔을까.

안철수 신당은 정책이슈를 지지하는 다양한 사회적 힘의 통로가 되어 정책실현의 동력에 투입되도록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사회경제 정책 대안은 이해당사자들의 합의 없이는 실현 불가능한데, 안철수 신당은 한나라당을 설득할 역량을 확보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신자유주의가 허용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인데, 이는 우리사회의 현주소다. 진보가 끊임없이 투쟁해 획득한 결과다. 안철수 신당의 사회경제 정책이 여기에 머문다면, 정당 하나가 더 출현해야 할 하등의 까닭이 없다.

정당정치의 틀에 갖힌 채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모호한 진보학자 최장집과 골수까지 보수이면서 진보를 향해 함께 가자고 손짓하는 안철수는 먼저 둘이서 융합해 창출할 가치와 시너지 효과가 무엇인지부터 밝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