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산 너머 저 하늘이 그리운 것은/ 멀고 먼 고향이 그립기 때문/ 멀고 먼 고향이 그리운 것은/ 고향의 어머니가 그립기 때문/ 고향의 어머니가 그리운 것은/ 어머니보다 더한 사랑이/ 더한 사랑이 없기 때문

김진균(金晋均)의 시 ‘그리움’이다. 추석 귀성객들의 마음을 이 만큼 더 잘 설명해 주는 시가 또 있을까 싶다.

더구나 가을이다. 어느날 떨어뜨렸던 짙푸른 생잎, 그 상처가 바람결에 되살아나는 가을이다. 어디론가 날아가 뒤척이고 뒤척이다 바스러져 먼지가 되었어야 할 잎새, 그러나 여전히 전신에 온전한 기록을 간직한 잎새와 불현듯 조우하게 되는 가을이다.

그리움의 본질은 슬픔이다. 대상이 누구이건 현실이 ‘함께’를 허용하지 않아서 생긴 화인(火印)이다. 찢기거나 베인 상처를 덧나지 않게 봉합한, 하지만 봉인의 아린 아픔은 생살 뿌리에 결절되어 정지된 시간의 체념과 좌절을 오롯이 기억한다.

우리는 몸 속에 그런 수많은 기억들을 간직하고 산다. 꼭 가을이 아니더라도 그리움은 시시때때로 꽃처럼 소리없이 피어났다가 지고는 한다. 생애 주기를 따라 이어지며 지워지지 않고 선명한 기억들은 문득문득 우리들 얼굴에서 피는 꽃이다.

그리움이 꽃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사랑에 닿는 영혼의 숨결이기 때문이다. 슬퍼서 아름다운 이 가을이 그것을 명증한다.   

이 가을이 가슴 깊은 곳에서 눈물을 길어 올리고, 서늘한 달빛으로 사무치게 심연을 물들여도 우리가 절망하지 않는 까닭이다.  

산다는 건 그렇게 그리움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그리움을 감당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오고 몸부림 치지 않아도 겨울은 잊혀지듯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그리움은 심연의 어둠을 비추고 있었다.

목이 긴 그리움은 철마다 피어 하늘하늘 흔들리며 새로운 열망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기대가 샘솟고, 눈을 맑게 씻어 또다시 놓치지 말아야 할 기회를 포착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리워 할 사람이 있다는 건 세상을 아름답게 만날 수 있는 조건이다. 그리움의 아픔 만큼 사랑이 깊었다는 걸 아는 사람일 테니까.

그러나 상처가 없는 가슴 속에는 그리움이 쌓일 공간이 없다. 만남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사람에게 공을 들이지 않는다.

욕망과 거래만이 만연한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간다. 열심히 달리기보다는 누군가를 밟고 그 위에 서며, 세상의 한복판에서 비켜서려 하지 않고 낡은 생각의 관성을 그 중심에 관류시키려 한다.

자신이 세상을 위해 해야 할 일보다 그 자리를 지키는 일에 더 많은 비용을 들이고, 상대를 무자비하게 타격하며 희열에 휩싸이는 사람들에게도 그리움이 있을까.

가을 하늘처럼 맑게 가슴을 씻었다 여긴 귀성길이 문득 암울해지는 이유다. 몇일 뒤면 다시 돌아갈 세상이 갑자기 낯설어지는 것이다.

인류의 유전자 지도에는 그리움을 가리키는 이정표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 그리움은 영원불멸의 인류에게 필요한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리움은 간절하게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으로 멀리 떨어진 절망의 장소에서 기적을 이루기도 한다.               

마음길은 그렇게 촘촘히 이어져 있지만, 그 길을 끊고 한 곳에 모여 철옹성을 쌓는 사람들은 ‘고립’을 승리의 ‘특권’으로 여긴다.  

황혼에 이르면 스쳐 지나간 모든 인연들이 그리워진다는데, 좋은 인연이었든 혹은 악연이었더라도 세월은 모든 것을 그리움으로 변환시킨다는데, 한 생을 사는 유전자의 과업은 모든 일들을 사랑으로 귀착시키는 것이라는데, 승리에 도취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는 그런 치환이 일어나지 않는다.

굳이 그들이 그리워하는 것이 있다면, 탄압과 침해의 수단이 허용되었던 시절이다.

최근 우리가 느닺없이 시험대에 오른 이유다. 우리는 비인류적이고 반인륜적인 군사독재시절과의 화해에 나서야 하는 것인가.

우리의 사랑은 사랑을 파괴한 사람들까지 그리움의 대상으로 치환할 수 있을까? 우문이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허용하고 있다.

오래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어야 할 전두환은 여전히 같은 하늘 아래서 숨을 쉬고 있다. 나아가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고 버티며 황제처럼 살면서 16년 동안 재산을 천문학적으로 불린 최근, 자식들의 형사처벌이 임박하자 추징금 원금을 납부하겠다며 이슈의 중심에 서는 현실이다.

과거 추방되었던 쿠데타 집권세력의 공작정치 수단이었던 정보기관발 공안정국이 부활했다. 국정원 전 원장은 지난 18대 대선과정에서 국정원 조직을 동원해 여당 후보를 이롭게한 여론조작 혐의로 법정에 설 시간이 임박했다. 국정원은 그 부정선거 논란이 이는 와중에 서울시장 등 야권인사 사찰과 우익세력을 동원하는 정치적 타격을 주도해왔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국정원은 또 부정선거에 대해 야당과 국민의 비판이 거세지자 전직 국가 정상의 대화록을 공개하고, 국회가 국정원 개혁을 주요 의제로 다루기로 하자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을 터뜨렸다.

우리가 기억 할 것은 ‘열정’

너무나 낮익은 행태들이다. 이같은 물타기, 메카시즘적 물아가기는 한 세대를 지나는 동안 박물관 어디 구석쯤에 있었다. 쿠데타 세력이 과용한 나머지 식상한데다 그 속셈이 너무나 뚜렷하게 드러나 집권세력 스스로도 더는 먹히지 않는 저급한 짓거리를 더이상 창피하게 생각해 폐기처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갑자기 30년 이전 시절로 돌아갔다.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우리가 허용했기에 가능했다. 국민들의 터무니없는 감상주의와 이해관계자들은 수많은 전두환을 육성했고, 국정원에게 헌정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을 부여했다.       

가을이 그렇다. 그리움을 안고 사는 사람은 무정한 세상에 떠밀려 더 깊은 눈물 바다에 빠지게 된다.

울컥 솟아오르는 그리움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사랑할 준비가 된 사람들의 헛점을 전두환과 국정원은 알고 있다.

그리움이 자꾸만 커가는 이 가을, 사랑하고 나누는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우리가 그리워 할 것은 철권통치에 전부를 던져 저항하던 우리들의 뜨거운 가슴이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