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이석기 파동은 평화의 그늘 아래 가수면 상태로 웅크리고 있던 ‘종북 담론’을 깨웠다.

일부 보수단체는 통합진보당의 해체를 요구하고, 민주당을 종북세력으로 규정하며 종북 여론몰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 서슬에 통합진보당의 국정원 규탄은 설득력을 잃었으며, 국정원 개혁을 외치던 민주당은 ‘민생’으로 가는 대열에 함류하며 장외투쟁을 접었다.

국정원의 공작이 성공하면서 지식인들과 종교단체, 학생 등 희망을 품은 국민들의 국정원 개혁 요구도 주춤하는 국면이다.

정전협정을 맺은지 60년이 지난 남북 냉전은 이렇게 엄혹하다. 불행한 역사의 재연을 막기 위해 당장의 불편을 강요하는 삐뚤어진 평화주의를 낳은 근원이다.

억압과 폭력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명분이었고, 적화야욕을 버리지 못하는 북한을 원천봉쇄하는 국방과 외교가 체제의 정의였다.

그것은 새 시대를 가로막는 장벽이었으며, 새시대를 꿈꾸는 사람들의 무덤이었다.

벽을 훼손하거나 벽 너머에 손을 내미는 이는 빨갱이가 되어 입이 틀어막히거나 감옥에 격리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 선혈이 낭자한 저주받은 역사는 그러나, 평화로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위험요소를 퇴출시킨 불가피한 선택들의 기록으로 미화된다.

벽은 높고 견고할 수록 좋고, 벽을 보며 좌절하거나 벽에 몸을 부딛히는 짓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부질없는 자해행위에 불과하다.
이런 체제의 지향으로 남한의 보수세력은 이제, 북한을 적으로 삼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북한을 적으로 삼는 이상 그들에겐 모든 것이 쉬운 일이었다. 대치 상황의 긴장만 적절하게 유지하면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부국강병이 존립기반인 나라, 국난의 타개 때마다 온 국민을 동원하는 나라, 국민은 우국충정에 불타고 동원에 잘 길들여진 나라, 빛나는 청년기의 국민은 군대에 가서 ‘충성’을 체화하는 나라, 외화 벌이를 잘 하는 대기업을 집중 육성하는 나라, 이런 부국강병의 노정에서 사용자의 노동력 착취가 불가피한 나라, 분쟁의 정의가 자본의 잣대인 나라, 대기업의 금고에서 넘치는 돈은 그 가족에 흘러들어 퇴장 화폐로 사장되는 나라, 정경유착과 권언유착 같은 짝짓기가 관행화된 나라, 이렇게 가만히 들여다 보면 ‘안보’ 하나면 모든게 다 되는 나라다.

반세기 이상 세뇌 당한 국민은 ‘안보’라는 암시에 우향우 한다. 얼마나 쉬운가.

이 나라에서는 안보를 위협하는 일당이 기소된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국정원은 체제의 축을 지탱하는 역할을 했다.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생각이다.

민주당이 국회에 들어가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국정원 개혁 의제 관철’ 의지를 불태울수록 좌편향 공세에 좁아질 당의 입지를 우려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민주당이 지금까지 보여준, 체제의 벽 앞에서 고뇌하지 않는 행태가 그 거울이다.

돌아서선 안 될 벼랑 끝에서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민주당은 돌아서서 납작 엎드렸다. 어떻게든 종북 담론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신중한 행보가 애처롭다.

지구상에 남한 같은 이상한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과 같은 이상한 공산주의는 또 있을까. 뒤집어 보면 북한도 남한과 같은 역사를 썼다. 세습 독재정권, 기아에 시달리는 국민에게 강병이 부국의 길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나라, 군비 확장을 위해 국민을 부역에 동원하는 나라, 핵실험으로 강대국과 힘겨루기 하며 줄타기 하는 나라, 그렇게 대내외적인 긴장감을 조장해 수령 유일주의를 공고화하는 나라, 최극빈국이면서 당과 군부가 소득을 독점하며 국민의 인권을 유린하는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나라,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국제적인 지위를 넘보는 나라, 돌이켜 보면 이 모든 우스꽝스러운 작태를 ‘핵’이 가능하게 했다.

남이나 북이나 정체불명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같다. 두 체제가 자가발전하는 ‘불안’은 지배의 칼이다.

오랜 세월 그 칼에 묻은 피의 주인들을 거명하자면 지면이 부족하겠고, 최근에는 정치적 중립의 향도였던 검찰총장을 벴다. 검찰이 정권의 시녀로 돌아가지 않으면 누구든지 제거하겠다는 경종으로 읽힌다.

남과 북 체제는 통일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체제 안에서 안보의 첨병인 국정원은 초법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그래서 ‘검찰이 국정원을 단죄한다는 것은 체제를 위협하는 것과 같다’는 망상이 정권 내부에서 팽배하지 않는 이상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국정원의 범죄 수법이 협잡꾼들의 수단과 다르지 않고 당초의 범의가 사리사욕에서 기인했다 하더라도, 현 정권의 집권과 관련되었다면, 그것은 국가 안보를 위한 활동으로 처벌대상이 될 수 없다는 체제의 공식이 뚜렷하다.

지난 10월 1일 국군의날, 축포가 터지고 전투기가 현란한 곡예비행을 하는 가운데 최신무기들이 도열한 서울공항에서 열병식을 마친 대통령은 전 군을 향해 ‘강력한 대북 억지력 구축’을 강조했다.

이산가족 상봉 논의는 경색 국면에 빠져들었고, 두 체제는 통일을 달가워하지 않는 양태다. 통일은 두 체제가 해체되고 새로운 단일 체제의 구축을 뜻하며, 보수진영이 주도하는 체제 유지에 가장 안정적인 모델인 독재시대로 회귀할 구실을 지워버릴 것이다.

이 나라가 통일을 이루어야 할 까닭이다. 북한의 부존자원과 값싼 인력, 남한의 자본력과 기술력이 이룩할 경제공영이나 막대한 군비 절감에 따른 성과에 앞서, 냉전을 볼모로 국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시대를 한시라도 빨리 종식시켜야 한다.

그 통일은 국민들만이 이룰 수 있다. 모든 국민들의 가슴에 꿈에도 소원은 통일일 때, 이 목숨 다바쳐 통일일 때, 그 통일의 노래가 온 누리 곳곳에서 울려 퍼질 때 통일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