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어릴적 겨울, 집 안마당 동쪽에 서있는 감나무에는 까치밥이 매달려 있었다.

무성했던 잎을 모두 땅으로 보내고 삭풍을 견디는 것은 감나무의 일이었고, 발가벗은 감나무 가지 끝에 붉은 열매를 남겨 놓은 것은 사람의 일이었다.

버리고 근본을 지키기에 진력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대를 이어 무리를 이루고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은 나무도 알고 사람도 알았다.

까치밥은 까치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결국 나무와 사람이 스스로를 보존하는 방법이었다.

까치가 먹은 열매의 씨를 꼭 마땅에 떨어뜨려 주지 않더라도, 거대한 우주는 이 열매의 씨 안에 결속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모두의 본능이었다.

씨과일을 먹지 않는 것은 감나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아무리 굶주려도 먹지 않은 씨앗은 새봄에 싹으로 돋아나 더 많은 것을 사람에게 돌려 주었다.

이처럼 그칠 때 그쳐서 참고 견딘다는 것은 씨를 새싹으로, 나무로, 숲으로 번식케 하는 힘이다.
생명의 뿌리인 씨과일은 절제와 나눔, 그리고 공유를 담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마지막 씨를 먹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지고 산다.       

까치밥은 이렇게 인류의 궁극적인 가치를 내포한다. 오래 전 약육강식의 시대에도 무엇이든 씨를 말리지 않는 자연법칙이 지배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렇게 삶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과 종 보존의 책무를 대물림하는 것은 인류가 도시를 이루면서 더 강조되었다.

정의로운 사회는 곧 공존하는 사회다. 우리가 추구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공존에 필요한 질서를 바로 세우고 누구나 기꺼이 그것을 따르는 세상이다.

같은 인류 안에서 특정한 종을 말살한다거나 약자와 소수에게만 희생을 강요한다거나 그것을 위해 폭력을 정당화하는 질서에는 미래가 없다.

도시국가들이 인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나설 때 국경은 한 낱 지정학적 구분에 불과하게 된 이유다.

공기와 물의 온도 변화를 함께 말하고 무너진 대기권 복원을 위해 함께 행동하는 사람들이 지구의 보편적 구성원이 된지 오래다.

그들은 또 죽음의 사자를 양산하는 문명에 저항한다. 오만한 인류의 다른 종에 대한 그릇된 태도를 변화시키는데 자신의 전부를 던진다. 

단 하나뿐인 지구의 의제를 제시하고 그 해법 모색과 실천에 모든 도시국가들이 함께 하도록 이끄는 선각자들이다.

72년 ‘유엔인간환경선언’과 지구환경보전의 기본원칙을 정한 92년의 ‘리우선언’ ‘의제 21’, 지속가능한 발전의 이정표를 제시한 일명 ‘요하네스버그이행계획’ 등은 그렇게 인류의 본질을 복원하려는 사람들의 희생에서 비롯했다.
하지만 이 나라는, 189개 나라가 참여한 요하네스버그선언 이후 10년 동안 일말의 진전도 없이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의 거리까지 과거로 회귀했다.

그 지점은 산업주의 시대쯤이다. 강바닥을 파헤치고 수많은 보를 설치한 ‘4대 강 사업’이 그걸 반증한다. 개발의 효과 조차도 모호한 가운데 강의 생태계는 파괴됐다.

강을 죽이는데 22조원이나 들였다. 이 천문학적인 숫자를 조금 실감나게 풀어보면, 경영난으로 허우적이는 5인 미만 중소기업 22만개에 각 1억원의 회생자금을 줄 수 있는 규모다. 실업 위기에 처한 111만명의 근로자를 구하는 생명의 자금이 될 수도 있었다.

살생의 댓가로 배를 불린 토공업자들은 밀양으로 전선을 옮겼다. 당장 필요해서도 아니고 미래에 대비하는 밀양 송전탑 건설은 공권력의 보호를 받으며 강행되고 있다.
착공 이래 5년 동안 주민들의 저지와 중단, 공사재개가 반복되면서 지난 해 1월에는 마을 주민 이치우씨가 제 몸에 불을 질러 세상을 떴다.

불통에 억울하고 억장이 무너져서 마지막 의사표시로 선택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한전과 정부는 주민들이 외치는 ‘환경정의’를 귓등으로 흘리고 있다.

그 사이 토공업자들은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공익’을 앞세워 반대하는 주민들을 공사에 걸리적거리는 한 낱 장애물로 취급했다.

공사가 재개된 지 일주일 만에 30며여명이 넘는 주민들이 부딪혀 다치거나 탈진해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가고, 11명이 경찰에 끌려갔으며 이 중 한명은 공사방해 혐의로 구속됐다. 제2의 이치우 씨가 속출 할 조짐이다.

주민들은 평생 바쳐 일궈온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생존권 문제와, 수 만 볼트 송전선로의 전자파에 노출되는 건강권 침해 문제를 ‘소수가 감수해야 할 불평등’으로 규정하는 정부에 저항하고 있다.

이나라 전력 생산과 공급 체계 자체가 ‘환경불평등’ 문제를 안고 있다.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의 전력 생산 비율은 5%지만, 소비율은 31.59%에 이른다. 원자력 발전소와 화력발전소는 경남·북, 충남, 전남 지역에 집중돼 있다.

결과적으로, 송전탑이나 원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쉽게 에너지를 이용하는 모든 국민들이 밀양시 산외면 여러 산골마을 주민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공존은 고통을 분담하는 것

그런 맥락에서 ‘밀양송전탑 서울대책회의’는 공존의 책무를 수행하는 유기적 주체다.
서울지역 청년학생과 시민, 교수, 신부, 언론인, 시민사회단체와 그 활동가 등으로 구성된 대책회의는 지난 8일 “주민들의 가슴을 밟고 건설하는 밀양 송전탑 건설은 중단돼야 한다”는 내용의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악전고투의 와중에 국민들의 무관심이 더 힘들었을 밀양 주민들을 어루만지고, 현장에 주둔해 있는 경찰병력 철수 등 평화적인 해결을 정부에 촉구했다.

그런가 하면 조성제 신부는 밀양시 산외면 동화전마을 주민인 김정회·박은숙 씨와 함께 밀양 송전탑 건설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지난 2일부터 서울 대한문 앞에서 무기한 단식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인류에게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은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부당한 정부에 선전포고 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판결하고, 어떤 경우에서든지 올바르지 않거나 범죄라고 판단되는 명령에 불복종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속가능한 인류의 척도 앞에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이며 ‘한 사람으로서 다수’를 형성하는 사람이다. 정의를 알고 실천해 사물을 변화시키고 관계를 변화시키는, 원칙에 따른 행동을 강조하며 야만의 권력과 불의에 공모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오늘, 톨스토이와 마하트마 간디가 뱉어낸 저 씨앗,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남긴 ‘시민의 불복종 운동’이 되살아나 난마처럼 얽힌 이 나라의 갈등들을 해소하고 부정의를 소멸시키는 힘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