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사물을 본다. 보이지 않는 동물의 위치를 소리를 통해 가늠한다. 지식과 경험의 촉수로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감지한다.

우리는 그렇게 생존한다. 감각은 자기 보다 크거나 작은 세상과 공존하면서 위험에 맞서는 본능이다.

오감은 건강 상태가 좋을 수록 더 빠르고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건강은 자기 인지능력에 대한 확신의 조건이며, 상황 대처의 정확도와 신속도를 결정한다.  

과민한 상태나 둔감한 상태는 건강의 적신호다. 특히, 작은 동물이나 보이지 않는 대상을 오인하고 실수하는 횟수가 늘어난다.

점차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분간하지 못하게 되고, '닥치는 대로 공격'을 최선의 방책으로 선택하는 방어기제를 생존 수단으로 삼게 된다.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면 오감은 육감으로의 확장성을 상실한다. 감각부전은 인지부전으로 전이되며 생각은 고립된다.

과거의 기억들, 감각부전이 시작된 지점에서 멈춘 낡은 사고 체계에 사로잡힌 일종의 '자폐' 병증이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통제 불능이 된다. 당장에 힘 조절을 못하게 되고, 평형감각과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생태계의 공적이 된다.

자신의 발 아래 무엇이 밟히는지 모른다. 이렇게 위험한 상태를 낳는 질환은 정신계에만 영향을 미치는 루게릭이다. 갈수록 생각 근육이 굳어가는 환자는 현실 속에 엄존한다.

더구나 그들은 권력의 중심부와 주변부를 장악하고 말기적 증상을 드러내지만, 그 병증의 자각증상을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진격의 거인이다.

사람들은 밟혀 터지고, 잡혀 찢기며, 물려 잘리는 참화 속에서 분노하지만 무표정한 권력 앞에서 다시 한 번 주저 앉고 만다.

상대가 모르는 화를 혼자 품는 것처럼 허망한 것도 없지 않은가. 

거인이 최소한 지팡이로 서 있는 자리와 진행 방향을 알려 준다면 밟히지 않고 피할 수 있을텐데, 또한 거인은 모르고 지나갈 죄악을 피할 수 있을텐데, 사람들은 그런 비현실적인 세상을 꿈꾸며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세운다.

전태일 열사 분신 43주기를 지나는 오늘, 사용자와 정부가 보여주는 살풍경의 노동시계는 전태일이 살던 시절로 돌아가 멈췄다.                

부당한 지시를 거부해 검사의 명예를 지키고 본분을 다한 윤석열은 처벌하고, 부당한 지시로 수사를 방해한 조영곤은 보호하기 위해 감찰위원회 위원들에게 노골적으로 '무혐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검찰은 정권의 시녀로 다시 돌아갔다.

이는, 초등학생을 성폭행해 생식기의 80%를 소실시키고도 "당시 술을 마셔 심신이 미약했다"며 무죄를 주장하고, 12년의 양형이 부당하다며 항소한 조두순 같은 진격의 거인이 배양된 환경이다.   

약자는 제몸에 불을 붙이고 공존을 부르짖지만 거인은 듣지 못하고, 건강한 자가 바르게 걸어갈 길은 지워진다. 약자가 숨을 곳 조차 찾기 어려운 사막화된 사회에서는 폭력과 약탈이 난무한다.

이 모든 책임을 권력으로만 돌릴 수 없다. 부당한 지시를 거부한 윤석열 검사 같은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가 국정원 내부에 존재하게 하지 못한 우리 모두의 책임을 돌아봐야 할 때다.

혹은 국정원 직원들의 '댓글 대선개입' 사건의 증거를 인멸하고 허위로 조작한 서울경찰청에, 청와대에, 국방부에, 새누리당에, 보수 언론에 건강한 사람을 보내지 못한 책임을 우리는 회피할 수 없다.

건강한 사람이 자랄 가풍이나 그들을 기를 스승이 없다. 건강한 것을 중시하는 교육체제나 사회풍토도 척박하다. 탐욕을 채울 방법은 대물림하면서 건강한 정신과 단절해 온 탓이다.

우리 모두가 병든 권력을 낳고 자라게 한 토양이다. 먼저 뒤를 돌아 본 다음 나아갈 방향을 재설정 해야 할 때다. 

생각 근육을 풀고 말 길을 놓아

200년 전의 사표 다산 정약용은 "상사의 명령이 공법에 어긋나고 민생에 해를 끼치는 것이면 마땅히 의연하게 굽히지 말고 확연히 자신을 지켜라"고 공직윤리를 제시했다. 일방통행식 상명하복의 룰에서 발생하는 폐해를 봉쇄할 금과옥조다.

다산의 이같은 선언은, 명령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이 받게 될 피해가 너무 크고, 그 명령을 수행하는 편이 더 자신에게 이로운 현실을 통찰한 결과다. 그런 200년 전의 폐단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갑이 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조직에서 상사의 지시를 논박할 기회가 막힌 오늘이다. 수 백년 전 전제군주 시절의 언로(言路)를 그리워하게 되는 까닭이다.

왕의 그릇된 판단을 바로잡아야 할 책무를 지녔던 '대간'은 늘 도끼로 죽을지언정 말을 물리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왕과 다른 의견도 거침없이 내 놓아야 하는 무거운 자리였다.   

언제 떨어질지 모를 대간의 목숨과 그 목숨을 담보한 말의 유실을 막기 위해 불문율이 생겨났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처벌하지 않고,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 출처를 묻지 않는 것'이 그것이었다.   

공직자가 상사에게 죄를 얻는 것 보다 국민에게 죄를 얻는 길을 선택하고 '부득이한 상황'을 내세우는 것은 사회를 도둑질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부당한 명령을 수행하면 본인이 멍들고, 상사가 멍들고, 조직이 멍들고, 나라가 곤경에 처하게 된다.

문제의 상사와 부하를 동등하게 처벌해야 하는 이유다. 악을 양지로 드러나게 해서 스스로 사라지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자폐와 루게릭을 앓고 있는 이 정부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의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고, 사방팔방 말의 길을 놓아 오감이 열리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