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가벼운 것, 스스로 움직이지 않되 사위(四圍)에 교응하며 변화무쌍한 것은 아름답다. 
바람 보다 가벼운 몸은 예측불허의 바람 길을 타고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을 넘나들지 않던가.

자유분방하지만 흐트러지지 않는 것, 상대를 초월하여 절대에 도달한 것, 절세의 예술혼을 뿜어내는 몸짓은 반드시 무거운 것을 버린 뒤에야 도달할 수 있는 진수(眞髓)다.

지난 18일 첫 눈이 내렸다. 짧은 순간이나마 천지를 분간 할 수 없는, 아니 천지를 가득 채운 눈의 바다가 열렸다.

갑자기 절애(絶崖) 끝에서 만난 순백의 바다, 그 아득한 어둠은 장자가 말한 곤(鯤)이 산다는 북명(北冥)일까.

그 물고기 곤이 한 번 날개짓으로 구만리를 날아 오른다는 붕(鵬)이 되어 하늘 연못 남명(南冥)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것일까.

천지의 통섭은 그렇게 보이는 것들을 덮고 보이지 않는 세상을 연다.   

차가운 것은 살 냄새를 지우고 살갗을 감싸는 빛을 씻어 허공에 오래된 언어를 돋을새김 한다.
앞으로도 오래 남을 살아있는 것들의 맑은 향내들은 냉기에 의해서만 추출되어 뇌수에 스며든다.

눈은 바람 처럼 나의 뼛속까지 길을 내고, 나는 그 시린 희열에 휘감겨 들어가 심연의 절대 고독을 들여다본다.

온 몸에 찢긴 상처들이 날개가 된 그 눈 앞에 서니, "그리움과 외로움이야 말로 눈과 나를 살아있게 하는 이유"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활강하면서 수 없이 떠는 눈은 길을 나설 때 정처를 갖고 떠났을까. 가장 깊은 살 속에 지도를 감춘 눈은, 망설이는 듯 그러나 단호하게 아래로 아래로 내린다.

집시처럼 조바심치며 사랑했던, 저마다의 그런 기억을 담고 하늘의 별이었던 눈이 허물어지듯 쏟아져 내린다.

서성거리는 눈, 누군가의 후회가 되고 싶지 않은 눈, 고통의 몸을 흔들어 사과 꽃 향기를 흩뿌리는 꿈을 꾸는 겨울 새가 지상의 집으로 돌아온다.
누군가는 지금 약속 시간이나 장소도 없는데 뛰어나가 조금만 더 기다릴 것이다 누군가를.
가볍고 차가운 것들이 쌓인 은세계, 그 아래에서는 해충이 사멸되고 그 밑에서는 함께사는 무리들이 숙면한다.

차가운 것이 더운 것을 품는 역설적인 진실 앞에서는 두렵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차갑고 더운 것을 분별할 줄 알았던가.

모두 다 지운 흰 눈 위에서 상투적인 것들만 기억하지 않았던가. 처음 만난 시(詩), 잘 영근 단단한 씨를 씹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모의 화폭에 뱉어버리지 않았던가.
누군가를 협량한 내 눈이 아닌 다른 눈으로 바라본적이 있었던가. 뜨거워야 할 때 온전히 뜨거워 본 적이 있었던가.

시를 쓰는 나는 수 많은 후회의 장애물들 앞에서 망연자실한다. 황망하게 달콤하고 분내나는 기억에 매달려 상투적인, 열에 들뜬 활자들을 눈 위에 올려 놓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활자 밑에 흥건하게 고인 눈물에 손을 씻는다.  

새로워져야 한다. 정성을 다해야 한다. 입자와 입자들이 엮여 한 몸을 이루고 서로 비비며 내는 거대한 공명을 듣기 위해서는.
첫 눈은 치유다. 안과 밖을 연결해 안의 병을 밖의 약으로, 밖의 문제를 안의 답으로, 안과 밖이라고 말하기 이전의 세상의 언어로 우리를 구제하는 묘약이다.

모든 것을 품지만 깊은 물일 때 처럼, 무미건조한 물일 때 처럼, 우리가 듣지 못했던 수없는 얘기들을 몸짓으로 들려주는, 눈은 어미이거나 사랑하는 이의 눈이다. 

이런 눈에 대한 나의 말들이 내가 알 수 있는 말들일까. 어쩌면 나는 지금 장자의 소요유에 취해 방언을 쏟아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묘한 눈의 자태에 심취하여 한껏 고양된 끝에 혼미한 상태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주체할 수 없는 마음 거두어들이지도 못하는 사이에도 눈이 내린다.
낡은 표현을 거부하고 허영과 허위를 비웃으며 눈의 먼지를 닦아 삼라만상의 그윽한 근원을 보여주는 눈이 겨울을 연다.

어떤 이는 김광균 처럼, 이 겨울 첫 눈을 지극히 외로운 눈으로 관통한 끝에 길을 열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는 눈의 소리에 가 닿을 것이다.             
'머언 곳의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그것은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에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켰을 때 들리는 소리다.

치유의 명현현상, 나의 '방언'

첫눈은 이렇게 설레임 속에 오건만, 뉴스는 여자들은 낭만을 사고 남자들은 온기를 산다고 전한다.
지난 3년간 여성은 커플룩, 레스토랑 식사권, 의류를 첫눈 오기 전주보다 더 많이 구입했고, 남성은 방풍비닐, 문풍지, 내의 등 방한용품을 더 많이 구입했다는 내용이다.

이제는 눈도 여자의 전유물이 되었구나. 본래부터 그랬던가. 여자는 눈을 즐기고 남자는 겨울의 표상인 눈을 두려워했던가. 

삶을 즐기는 성과 삶을 책임지는 성의 구별 앞에서 남자는 말하고 싶다. "우리나라 가계 빚이 갈수록 늘어나고 채무자 열명 중 일곱명이 원리금 상환에 부담을 느끼는 상황이더라도, 우리나라의 소득분배 불평등도가 34개 경제개발협력기구 회원국 가운데 최상위를 차지하더라도 나는 첫눈을 기다렸노라"

눈이 때를 알듯이 봄은 올 것이다. 아무리 무겁게 쌓이 눈이라도 결국 왔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던가.

남자이기에 더 세파에 찌든 마음을 눈에 씻고 싶다. 불현듯 찾아온 첫눈에 소박하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순백의 골목에 발작국을 남기며 미끄러지거나 넘어지기도 하면서, 눈을 사랑하기를 나와 같이 하며 나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달려가 다른 것은 말고 눈 만을 이야기하고 싶다.  

결국 열락의 순간이 지나고 나를 데리고 다니던 눈이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 되고, 빛도 향기도 없이 내 슬픔 위에 고이 서리더라도 찰라를 허공에 사는 눈에 마음 맡기기를 거둘 수는 없다.

결국 하나가 되는 걸 알지만 앞서거니 뒷서거니, 무겁게 바람결을 찢고 수직으로 떨어질 때도 허공에서는 저마다 한 점을 자랑하는 혼돈 속의 질서. 다양성의 미덕을 밝히는 하늘의 길. 그 길에 이 나라에 가득한 반목과 불신, 독선이 닿아 정화되기를.

책임지지 않고 반칙을 일삼는 정권은 내가 눈을 천착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