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권력의 정통성(리지터머시)은 정당성으로 획득된다. 누구나 안다. 그러나 누구라도 정통성 문제를 제기하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특히 선출직의 정통성은 합법적 절차와 정량적 대결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일어난 부당한 작용에 등가를 매기기가 어렵다.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해 현 정권을 창출하는데 직접적으로 기여했다고 하더라도, 국정원을 단죄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부정의 정도가 대통령 당선을 원천무효로 볼 만한 것이냐는, 다각적인 평가와 복잡한 과정의 국민적 합의에 의해서만 해답에 도달할 수 있다.

뜨거운 감자다.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을 재단하는 과정은 당장 무정부 상태와 다르지 않은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칠흑의 어둠 속에서 난마를 풀고 재선거를 치른다 하더라도 그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우리는 또 감당해야 한다.

정부의 정통성을 정치적으로 건드린다는 게 조심스러웠던 이유다. 따라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대통령 사퇴' 언급은 판도라의 상자를 연 행위다.

얼마나 무모한 행위인가는 앞선 사실들이 웅변한다. 현 정권은 고사하고 대선에서 부정선거를 주도한 국정원을 법정에 세우려던 검찰 지휘라인은 이미 초토화됐다.

채동욱은 검찰총장후보자추천위원회가 추천한 3명의 후보자에 올랐을 당시 오랜 세월 다진 경륜의 눈으로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다음과 같이 예감했다. "지금 가장 뜨거운 사건은 경찰에서 수사하고 있는 국정원 댓글 사건이다. 앞으로 검찰로 넘어올 텐데, 어떻게 할지. 국정원이 직접 나선 것이고, 검찰이 수사를 하다 보면 현 정권의 리지터머시(정통성)를 건드릴 수 있다. 그러면 정말 골치 아픈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면 저 동네(대검찰청)에 가기도 싫다."

채동욱은 검찰총장에 임명된 뒤 특별수사팀을 운용하는 가운데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을 공직선거법 위반혐으로 기소했다. 그런데 정권은 이같은 공직자에 대한 사법적 판단을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을 건드린 것으로 확대 해석했다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채 총장은 6개월만에 혼외아들 의혹에 휘말려 낙마했고, 윤석열 특별수사팀장과 박형철 부팀장은 국정원의 대대적인 대선개입 정황을 포착하고 강제수사에 나서면서 상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비위 혐의로 특별수사팀에서 배제된 채 징계의 대상이 됐다.

또, 특별수사팀의 강제수사를 막은 것으로 알려진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은 부당지시에 따른 징계는 모면했지만, 스스로 사건 지휘와 조직 기강에 대한 책임을 안고 검찰을 떠났다.     

자의든 타의든 검찰을 떠난 이들은 뚜렷한 경구를 남겼다. 정권의 정통성을 건드리고서 검찰조직에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출세가도를 달리리라.

정치 검사는 물만난 고기가 됐지만, 신념있는 검사는 권력분립을 부정하는 정권의 야만과 광기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것이다. 이 정권에서 온전한 검사가 몇이나 살아남을까. 정권의 시녀들은 무고한 국민을 얼마나 재물로 삼을까.

이런 무법천지에 종교단체의 박창신 신부가 정권의 역린을 건드린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3년 전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을, '엔엘엘에서의 한·미 군사훈련에 대한 북한의 대응'으로 두둔한 발언은 침을 흘리는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꼴이다.

대통령은 "혼란과 분열을 야기하는 일들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비판했고, 국무총리는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적에 동조하는 행위"라고 규정했다. 또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박 신부의 언동이 북한의 반정부 대남투쟁 지령과 연계되어 있는 것처럼 몰았다.

정부와 여당의 이런 신호는 보수언론과 보수단체의 동원령이 됐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박창신 신부는 수 일간 뭇매를 맞으며 국민들 뇌리에 '종북세력' 혹은 '종북주의자'로 낙인됐다.    

이같은 여권의 총공세가 국면전환을 노린 것이었다면 성공할 것인가. 이 정권은 이미 이석기 사건을 기화로 통합진보당의 해산을 요구하는 등 진보공동체 내부에까지 공안논리인 종북 프레임을 이입시켰다. 지금까지 '종북몰이'이야 말로 박근혜 정권의 정통성을 지키는 확실한 수단이었으니 기회를 만난 여권의 폭주는 끝장을 보고서야 그칠 것이다.

'종북'은 정적을 제거하는 칼일 뿐만 아니라, 이미 규명된 역사를 왜곡하는 도구로 쓰일 정도로 절대무쌍의 무기다. 비근한 예로 수구 우익 단체들은 광주학살이 인민군 특수부대 600명이 남파되어 저지른 양민학살이라고 주장하며 세계기록유산에 광주민주화운동 등재를  반대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집중포화는 살풍경을 만들기 마련이다. 번뜩이는 섬광과 화약냄새가 시선을 오래 사로잡을 수 없는 이유다. 국민들은 곧 눈을 돌려 박창신 신부가 집전한 시국미사의 핵심 발언인 '대통령 사퇴' 요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정권은 전체 문장 중 한 부분에만 시선이 머물기를 바라는 우를 범한 것이다. 국정원 직원들이 생산해 배포한 대선 개입 댓글들이 수 만건에 이르는데, 이것이 박근혜 후보의 당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느냐의 시비 이전에, 이런 국기문란의 범죄행위를 잘 알고서도 방치하는 대통령에 대한 주권행사가 사제들의 시국미사였다.

국민들이 그 진실을 포착하는 순간, 대통령과 여권이야 말로 진영갈등을 심화시키고 국론을 분열시키는 주범이라는 사실도 동시에 깨달을 것이다.

이 정권은 극단의 끝이 반대편과 맞닿아 있다는 진리를 망각했다. 그들이 구축한 종북프레임에 그들 스스로 갇히게 될 날이 머지않은 걸 말해주는 징후다.     

지난 대선을 부정선거로 얼룩지게 한 뿌리가 이명박 전 대통령이라 인식했고, 같은 정부가 북한을 강경일변도로 자극하면서 정보기관의 권력과 종북프레임을 공고히 한 결과가 오늘 막가는 정부를 창출했다는 생각에 박창신 신부는 절박했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 마음의 과잉이 박근혜 정부를 파멸로 치닫게 하는 역설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개벽은 그렇게 오는 것이리라. 의도했든 아니든 한 사제는 역주행하는 민주주의를 돌려 세우는 제단에 자신을 던진 모양새다. 종북 공세의 빌미가 된 노 사제의 발언 부분을 주목하는 이유다.

양치기 소년 '종북'이 가리키는 곳

'종북'이라는 화학무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세력은 결코 통일을 원치 않으며, 오히려 '종북'의 파괴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켜 온 사실 앞에서 사제는 숨이 막혔을 것이다. 국정원은 그 북한 적대정책의 전면에 있으니, 이 사태의 막장에는 양심세력의 초토화가 기다리고 있다는 예감에 몸서리쳤으리라.

형체도 없는, 그래서 더 치명적인 '종북'이야 말로 '악마'라는 자각이, 사제들로 하여금 현 정권의 리지터머시를 건드리게 한 근원이었다.

이 정권은 이석기 의원을 내란예비음모 등 혐의로 기소하고 그가 속한 통합진보당의 강제해산을 주도하면서 길을 잘못 들었다. 수구 언론과 지상파 뉴스의 퇴행적 비판 덕에 진보당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부정적으로 굳어지고, 제1야당이 원론적 선을 긋는 마당에서 과다 분비된 아들레날린에 도취됐다.

청와대는 흥분에 고양된 나머지 정국을 종북몰이에 최적화된 판으로 읽는 우를 범했다. 양적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공론의 장이 완전히 편향적으로 기울어 작동하고 있는 현실이 그것을 더욱 부추겼다.    

그러나 청와대의 정의의 사제에 대한 종북 씌우기 승부수는, 국정원의 대선개입은 불법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국민들에게 종북 딱지를 붙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국민들은 이제 이 식상한 '종북'을 정면에서 보게 될 것이다. 냉전시대에 억압의 수단이었던 낡은 유물이자 모든 양심세력의 족쇄였던 '종북'이 양치기 소년과 같았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을 것이다.

이 승부수는 정권의 존립 근거 자체를 덮치는 자충수가 될 것이다. 공작정치와 공안정국이 전부로 보이는 나쁜 권력은, 상식에 입각해 세상을 살아가는 국민들 모두를 적으로 돌렸다. 공안정국의 수위는 너무 높은 곳까지 도달했기에 곤두박질쳐 박살날 때까지 제동을 걸지 못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쉬웠지 않은가. 대통령이 사과하고 관련자들을 색출해 엄히 처벌했으면 이 정권은 정통성을 지킬 수 있었다. 마땅히 생각해야 한다. 대통령이 용납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