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청와대가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 아들로 의심받는 채 군의 개인정보를 불법으로 입수한 정황이 속속 포착되고 있다. 청와대 기획 ‘채 전 총장 낙마 시나리오’에 대한 의혹의 칼날이 미봉된 껍질을 절제하며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는 양상이다.

청와대 행정관이 서초구청 행정지원국장에게 채 군의 개인정보를 불법으로 열람하도록 요청했고, 신원정보를 확인해 준데 대해 감사를 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은 사실관계는 휴대전화의 문자로 이루어져 빗나간 권력의 안하무인적 오만을 증언한다.

문자 메세지가 전송된 지난 6월 11일 오후 4시께는 채 전 총장이 국정원 의혹사건 처리관련 검찰총장의 입장을 발표하며 원세훈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겠고 밝힌 지 1시간이 흐른 뒤였다.

청와대 행정관은 청와대 총무시설팀 총괄행정관의 직속 부하이고, 총괄행정관은 전 국정원 직원이었던 인물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측근으로 확인되고 있다.

또, 총괄행정관에게 정보수집을 부탁했다는 안전행정부 직원은 직전 청와대 민정수석 밑에서 선임행정관으로 근무했던 자다.

자체 조사결과를 발표한 청와대가 총괄행정관의 '개인적 일탈'로 선을 그었지만, 시점과 인맥관계는 뚜렷하게 청와대와 국정원간의 교집합 안에 들어있는 총괄행정관을 가리킨다. 

청와대의 이런 행태는, 국정원의 댓글 공작이 ‘나는 모르는 일이고 무관한 일’이라고 일축해 온 박 대통령의 목을 조른다. 국정원에 셀프개혁을 주문하며 지난 대선에서 선거법을 위반한 관련자들은 법에 따라 처리하면 그만이라는 대통령을 자꾸만 40년 전 미국 닉슨 대통령의 처지로 몰아넣고 있다.

우리가 그 40년 전과 오늘을 혼동하는 이유다. 며칠 전에 워터게이트 사건을 언급한 문재인 의원도 사법방해 등 미증유의 사태 한 복판에서 닉슨의 데자뷰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는 닉슨이 ‘전혀 모르른 일,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거짓말한 책임을 추궁당해 사퇴를 자초한 것’이라고 상기시켰다.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첫번째 사법방해는 백악관이 피고인들에게 압력을 가한 것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 5개월 전, 워터게이트 사무단지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침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체포된 5명의 괴한들은 재판 과정에서 백악관 간부로부터 허위진술과 침묵을 강요당한다. 재판을 주재하던 죤 시리카 판사는 이를 공개했다.

사건 초입에서 공화당 후보인 닉슨 대통령 정부는, 체포된 범인의 수첩에서 백악관 연락 전화번호가 나왔는데도 ‘3류 좀도둑들의 소행이다’며 의혹을 일축했다.     

백악관은 상원의 국정조사 특위가 가동되는 과정에서 두번째 사법방해를 자행한다. 콕스 특별검사는 대통령집무실의 자동녹음 테이프를 제출하라는 소환장을 발부했는데, 테이프에는 닉슨 대통령과 존 딘 백악관 법률고문의 ‘날조를 통한 수사 저지’를 공모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닉슨은 대통령 특권으로 이를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엘리엇 리처드슨 법무장관을 통해서 콕스에게 소환장 취소를 명령했다. 콕스가 이를 거부하자 닉슨은 법무장관에게 콕스의 해임을 요구했으나 법무장관은 자진사퇴를 선택했다. 뒤이어 란케르즈 하우스 법무차관도 명령을 거부하고 사임한 가운데, 보크 법무차관보가 임시 법무장관대리로 콕스 특별검사를 해임하기에 이른다.

백악관의 마지막 사법방해는 자의적으로 편집(조작)한 대화기록 테이프를 공개한 것이다. 백악관의 이같은 증거물 훼손은 상원의 청문회 과정에서도 백일하에 드러났고, 닉슨에 대한 보수적인 지지가 크게 약해졌다.

원본 테이프 제출 공방은 대법원까지 이어졌고,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닉슨 대통령 특권을 무효화하는 동시에 특별검사에게 테이프를 넘겨줄 것을 명령했다. 이는 닉슨의 지위가 크게 부정되는 계기가 된다.

그 뒤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된 닉슨 대통령의 측근 7명이 기소됐고, 대배심이 닉슨을 기소하지 않은 공모자로 지명한 가운데, 하원 사법위원회의 ‘사법방해’ 혐의에 대한 1차 탄핵을 비롯해 ‘권력남용’에 대한 2차 탄핵, ‘의회 모독’에 대한 3차 탄핵이 이어졌다. 닉슨은 하원의 탄핵이 최종 결의되기 전 날 밤에 사퇴를 발표한다.

대한민국의 18대 대선 1주일을 앞두고 불거진 ‘국정원 게이트’를 보자. 인터넷 여론조작 활동으로 선거에 개입하던 국정원 직원 김 씨가 체포됐을 때 박근혜 후보는 그런 사실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국정원 여직원 인권침해’론으로 의혹을 제기하는 민주당에 맹공을 퍼부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 국정원의 불법 대선개입 사실이 속속 드러났지만, 박 대통령은 철저히 모르쇠로 일관했다.    

대통령의 헛발질

이같이 당사자가 보인 반응의 유사성 말고도, 국정원 게이트는 적어도 워터게이트의 4가지를 복사했다. 우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발생한 심각한 불법행위라는 점, 권력의 조직적인 야당 침해라는 점, 사건이 축소·왜곡되어 묻히고 선거가 끝나 여당 후보가 당선된 후에 실체적 진실이 드러났다는 점, 증거인멸과 권력의 사법방해 의혹이 제기됐다는 점이다.

특히, 국정원장의 기소를 지휘한 채동욱 검찰총장의 낙마, 국정원 댓글 혐의를 추가 기소한 윤석열 특별수사팀장에 대한 직무 박탈은 워터게이트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헛발질을 계속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문형표 보건복지부장관 등의 임명동의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국회가 파행으로 치닫고 있는 와중에 박 대통령은 나흘만인 지난 2일 그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의 귀에 “소신도, 도덕성도, 약속도 저버린 상처뿐인 장관의 탄생”이라는 야당의 목소리가 들릴 턱이 없다.

더구나 박 대통령은 이날 함께 임명장을 받은 감사원장과 검찰총장을 향해 “어떤 경우라도 헌법을 부인하거나 자유민주주의를 부인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단호하고 엄정하게 법을 집행해 그런 생각은 엄두도 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 말 앞에서 불현듯 한 생각이 떠올랐다. 박 대통령도 워터게이트와 같은 국정원 게이트의 비극적인 결말을 예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치권과 양심세력 사이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대선 불복 논란이 국정원 게이트의 최후를 촉발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안겨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는 새로 임명된 사정의 양날개를 향해 이렇게 명령했어야 한다. “국정원 사건을 성역없이 수사하되 한 점 의혹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 관련자는 누구든지 엄히 처벌하여 오늘과 같이 헌법과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일이 재발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