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우리의 정치는 경제와 같은 추세를 보인다. 전후 고도성장 신화를 써온 한국 경제는 저성장의 늪에 빠졌으며, 민주화 이행 이후 눈부신 진전을 이뤘던 정치는 과거로 회귀해 낡고 천박한 정치문화 속에서 허우적이고 있다.

여전히 대기업이 주도하는 국내총생산은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3퍼센트를 밑돌고, 국민소득 역시 6년 동안 1.9퍼센트 늘었을 뿐이다. 기존 추격성장 패러다임이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고령화와 저출산, 고용없는 성장 또는 사회 양극화 등 숱한 난제에 봉착했으나, 삼성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저급한 기업문화로는 장기침체를 극복하기 어려워 보인다.

3년 전 삼성전자 사내 전산망에 노동조합을 만들자는 글을 올린 죄로 해고된 박종태 대리는 23년 동안 몸과 마음을 바친 직장의 불편한 진실을 책에 담았다.
표제는 '환상'이다.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기억하는 국민들의 동경을 환상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증언한다.

IMF이후 구조조정의 칼을 쥔 삼성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강도높은 노동을 강요해 여사원들의 유산이 속출했고, 하룻밤이 지나면 동료들은 해고로 사라지고 없었다. 폭력이 일상적으로 난무했으며 사원들이 흘리는 고통의 눈물이 직장 구석구석에서 차올랐다.   

삼성은, 사원들의 불이익을 막는 일에 헌신하는 박종태에게 견강부회의 죄를 씌워 2개월 정직 처분을 하고, 회사의 3천억원대 회계조작에 의문을 제기한 그에게 감봉 6월의 중징계를 처분했다. 업무정지 처분을 받은 그는 회사와 동료들이 합세한 조직적인 왕따에 시달렸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그는 두 차례 유서를 쓰기도 했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그가 사내 게시판에 노조건설을 공개 제안하고 해고된 뒤 지금까지 기나긴 복직투쟁을 하게 된 배경이다.    

박종태는 투쟁과정에서 삼성이 철저한 특혜의 산물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국가는 천문학적인 국민세금으로 정보통신 등 각종 최첨단 핵심과학기술을 개발해 제공해왔으며, 세계 최저 수준의 법인세율 혜택은 물론, 휴대전화 기지국이나 도로 통신 등 필요한 모든 기반을 지원해 왔다.

또한 국민들은 해외가격보다 더 비싼 삼성 제품들을 열렬하게 소비한다. 여기에는 세계적인 자국 상품에 대한 맹목적인 자긍심 혹은 애국심이 작동한다. 삼성의 성장요인을 풀이할 때 국가와 국민들을 떼놓을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삼성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이건희 한 사람이고 그와 족벌체제는 이익의 대부분을 사적으로 거둬들인다. 이런 삼성의 후진적인 지배구조와 노동관이 사원들의 모든 고통을 배태했지만, 이건희는 이를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괴물이었다. 

삼성을 위해 이건희가 공헌한 부분이 있다면 그가 올해 배당받은 1,200억원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그가 남은 생을 영위하는데 이 재화는 과잉이다.

그런데 이건희는 경영권에서 손을 떼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가져가기 위해 차명 계좌와 차명 주식을 동원하고, 그렇게 조성된 비자금으로 정치와 법, 언론까지 매수해서 체제를 공고화하고 있다.
박종태가 "삼성의 문제는 단지 삼성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권리와 민주주의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들이다.

하지만 박종태의 투쟁은 국민의 환상을 깨기 어렵다. 국민들의 뇌리에는 삼성제품을 선전하는 김연아의 이미지가 자리잡고 있는 까닭이다. 삼성의 다른 사원들도 박종태에게 힘을 실어주지 못한다. 진실을 발설하면 퇴출된다는 공포가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쥐어짜기를 당하는 작업현장에서 타살과 자살이 잇따르고, 제2 제3의 박종태가 속출하는 것을 부의 특권으로 뭉게는 경영이 지속가능한 것일까. 외부의 공세는 갈수록 거세질 것이며 내부의 파열음은 아비규환을 이룰 날이 머지 않았다. 제3의 눈은 가장 화려한 곳에서 몰락을 예감하는 것이다. 

삼성 직원뿐 아니라 국민들도 삼성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초일류 기업 취업을 열망하는 이들이 희망을 잃는 것이니까. 정부의 대기업 부양책이 번번히 먹히는 이유다. 하지만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인 경쟁 틀에 사원들을 몰아넣고 이윤만 챙기려는 시스템이 얼마나 가겠나.

오히려 삼성은 변화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역설이 유일무이한 처방전이다. 비단 삼성 뿐이겠는가. 대한민국에 삼성과 같은 대기업이 한 둘인가.

광속 기술 발달에 사라지는 일자리들

이런 위기의 경제를 대면하는 정치의 현주소는 어떤가. 대기업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부여할 경제민주화 관련법들은 미숙아 혹은 불구로 태어났다. 그나마 최소한 경제민주화 구호라도 유지시킬 이 법들마저 박근혜 정부의 친 재벌 기조에 의해 사장될 공산이 높은 실정이다.

특히, 이 정권은 정치를 '종북'과 '대선불복' 프레임으로 압살시키는 중이다. 다른 진영을 인정하지 않는 불통과 독선은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고, 상대를 격화시켜 실수하기를 기다리는 양태다. 상대진영이 임계점에 다다르면 '공안 몰이'의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대통령 사퇴를 언급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민주당의 장하나와 양승조 의원이 그 덫에 걸린 희생자들이다. 민주화 시계를 거칠게 뒤로 돌리고 있는 청와대와 여권이 '민주주의에 도전'이라는 레드 카드를 들고 민주인사들의 퇴장을 명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함께 가지 않고 따로가는 정치는 고립을 자초한다. 독점욕은 내부에서도 작동하고 이를 제거하는 것은 따로가는 정치의 본질을 부정하는 탓에, 다른 진영을 완전히 파괴한 뒤에는 자신의 분열과 파괴의 도미노를 초래한다. 결국 가장 강한 한 사람만 남기는 정치 게임을 이 정권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대기업이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여기고 정치가 길을 잃어버린 사이에 첨단 기술의 발달은 노동자들의 설 자리를 삽시간에 박탈하고 있다. 

3차원(3D) 프린터는 자동차 제작기간을 10배 가까이 단축하는데, 인건비가 거의 필요 없고 제작단가가 매우 저렴하다. 위험하거나 정밀한 일과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로봇의 일반화가 코앞에 성큼 다가왔다.

당장 닥칠 출구없는 대량 실직사태를 우리 정치와 경제계는 극복할 역량을 지녔을까. 2013년 세밑은 나라 전체를 도탄에 빠뜨릴 시한폭탄을 다가오는 해 앞에 무표정하게 내동댕이 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