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실화를 재구성한 영화 '변호인'의 배역들은 큰 틀에서 뚜렷하게 둘로 나뉘어 '확신'을 소화한다.

변호인은 부당한 공권력의 폭거에 맞서 피해자를 구제하고자 하지만, 고문경관에게 빨갱이는 체제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양민을 학살하는 위험한 존재일 뿐이다.

반면, 상부의 지시를 받고 사건 조작을 진두지휘한 경관의 생각은 그것이 빨갱이들의 준동을 막는 일이기에 정당하다. 그는 격투중에도 애국가가 울리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법정에선 "나 같은 사람이 빨갱이를 청소해주니까 국민들이 발뻗고 잘 살 수 있다"고 호통을 치는 애국자다.

상부의 뜻을 잘 알고 있는 검사와 판사는 어떤 경우에도 피의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해야만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다. 그들은 군사독재시대에 필요한 '권력의 시녀'역을 잘 체화했는데, 그것은 사법이 권력을 위해 발동할 때는 국민들을 얼마든지 유린할 수 있다는 확신의 원천이다.    

'변호인'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사건의 몸통을 직접화법으로 드러낸다. 신군부는 수많은 경관 중에서 적임자로 한 경감을 차출해 부산에 내려보내는 데, 그의 아버지는 일제하의 고등계 형사였다가 6.25동란 중에 인민군 혹은 좌익세력에게 학살 당한 것으로 그의 입을 통해 진술된다.

인사가 만사다. 차동영은 부여받은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한다.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 감금하고 고문을 통해 허위자백을 받아 '반국가단체 고무·찬양' 혐의로 기소했다.

이른바 부림사건은, 멀쩡한 인문학 서적을 불온서적으로 몰아세우고 책을 나누어 본 사람들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여 단죄한 신군부의 기획작이다. 광주에 군대를 투입해 양민을 학살하고, 폭동을 진압한 것처럼 속여 정권을 잡은 신군부가 진실을 공유하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부산에서 획책한 마녀사냥의 일종이다.

전두환 정권이 부당한 통치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자행한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탄압은 비슷한 시기에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부림사건은 같은 해 5월부터 수사에 들어간 '전민학련 사건'과 '전민노련 사건' 그리고 '부산대 학내시위' 같은 반정부 정서를 정면돌파하려는 신군부의 의지에서 비롯했다. 물불 못가리는 폭압은 정권의 정통성 시비 확산을 조기에 진화하려는 조급증과 맞물려 있었다.

공안당국은 부산지역 청년운동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본보기로 찍었다.
어느날 느닷없이 납치를 당한 사람들은 짧게는 20일부터 길게는 장장 63일동안 감금된 채 쇠몽둥이 구타와 물 고문, 통닭구이 등 살인적 고문을 당하면서 검사가 원하는 자백을 하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진술에 따른 벌을 확인하기 위해 법정에 설 수 있었다.   

80년대를 겪어보지 않은 세대에게는 너무나 괴리감이 큰 과거다. 영장없이 체포하고 구속한 상태에서 보호자에게 연락도 하지 않은 채 고문을 가한 모든 불법 행위란, 감독이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설치한 픽션의 덫으로 여겨질 공산이 높다. 그것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누가 믿고 싶겠는가.

그러나 부림사건은 실재다. 헌법과 형법을 부정하는 부당한 공권력에 맞섰던 변호인은 법정에서까지 피고인들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증거와 증언이 배제되는 것을 경험하고 이후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그가 바로 노무현이다.

그 역시 부림사건 이전까지 대한민국은 정의가 살아 숨쉬는 법치국가라고 굳게 믿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막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하면서 고시공부를 한 끝에 사법고시에 합격해 판사로 임용됐듯이, 대한민국은 노력한 만큼의 과실을 딸 수 있는 기회의 땅이라는 점에 한 점 의심도 하지 않았다.

돈을 벌기 위해 판사직을 1년 만에 때려치우고 당시에는 최초로 부동산 등기 대행 변호사가 되었던 자신감도 공정한 시장 혹은 기회가 균등한 세상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했다. 세무·회계 전문변호사로 명성을 얻은 그의 눈에 데모하는 사람들은 '밥 먹고 할 짓 없는 사람들'일 뿐이다.

영화 '변호인'은 이런 속물 변호사가 어느날 고문으로 빨갱이를 만들어내는 국가를 목도하며 인식의 틀을 깨고 더 넓은 세상으로 뛰쳐나가는 시기에 집중한다.

영화의 마지막 앵글이 투사가 되어 법정에 선 노무현과 그의 변호에 참여하겠다며 법정에 나온 부산지역 변호사 20명의 이름을 재판장이 일일이 호명하는 장면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같은 현장에 노출될 경우 노무현 또는 그의 변호인들과 행동을 함께 할 것이라는 감독의 확신일 것이다.     

노무현이 국회의원이 되고, 청문회에서 전두환을 향해 명패를 던지고, 지역감정 타파에 정치생명을 걸고, 경상도 사람으로서 호남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이 되고, 불의한 권력이 자신의 명예에 흠집을 내려 할 때 죽음으로 맞선 노무현은 앵글 밖에 있지만 '변호인'의 매 순간에 투사되는 까닭이다.

몰상식이 부른 지각변동

'변호인'은 불의에 맞선 정의가 확장되며 거리로 나가는 대신 표로 의견을 표명하는 성숙된 민의로 발원하는지를 정확하게 포착한다. 그 곳은 바로 영원을 꿈꾸는 권력의 착오에서 비롯한 '억압'이다. 흐르는 물을 언제까지 얼마나 막아 가둘 수 있겠는가. 많이 가둘수록 피로도는 높아지고 터지는 날엔 막았던 흔적 조차 사라지는 순리를 망각한 지점이다.    

영화 변호인이 오려낸 법정은 지금도 끊임없이 복제되고 있다. 박정희와 김일성이 합의한 통일 3원칙인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도 공안 당국이 찍은 사람들이 입에 올리면 '종북'이 된다.

정통성 시비에 휘말린 오늘의 정권이 처한 환경도 그 때와 흡사하다.  

상영 7일만인 크리스마스에 '변호인'은 관객 300만명을 돌파하며 신드롬을 만들었다. 색깔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행렬이다. 제2, 제3의 노무현이 이번에는 극장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남북 위기를 조장하고 빨갱이를 소환해 잘못을 미봉하는데 급급한 정권의 퇴행에 염증을 느낀 대중들의 또다른 촛불이다.      

비상식적인 일들은 목도하고도 선뜻 나서지 못하도록 작용했던 기제 '빨갱이' 혹은 '종북'논리가 용도폐기되는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고통받는 누군가가 타자가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변호인'의 상식적인 시선을 통해 투영되며 인간의 존엄이 가치에 중심에 서는 지점이다.

그것은 대중들의 상식에 대한 갈증과 몰상식에 대한 분노가 이끄는 지각변동이다. 상식을 부정하는 '종북'이라는 억압을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 정권은 종언을 고할 수 밖에 없는 변화다.